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들어온 것은 서울의 매연 섞인 건조함과는 차원이 다른, 제주의 눅눅하고 달큰한 흙 내음이었다. 2016년 5월의 표선은 이미 초여름의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활주로 너머로 흔들리는 야자수 잎들은 서걱거리며 이방인들을 맞이했다.
최시영은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며 셔츠 소매를 아주 살짝 걷어 올렸다. '무조건 캐주얼'이라는 공지에 따라 고심 끝에 고른 이탈리아산 린넨 셔츠가 제주의 바람에 기분 좋게 펄럭였다. 이 셔츠를 고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비싼 편안함. 그게 이 셔츠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사실 그 이틀은 다른 이유로도 기억될 것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시영은 출장 가방 속에 넣어둔 서면 초안을 잠깐 꺼냈다가 다시 접었다. 이준형 파트너가 검토한 그 초안은 온통 빨간 줄과 물음표로 가득했다. 사무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펼쳐봤을 때 발견한 것 때문이었다. 빨간 줄들이 난도질한 자국들 사이, 가장 구석진 모퉁이에 파트너의 정갈한 필체가 남아 있었다.
고생했다. 논리는 살아있네.
시영은 그 쪽지를 항공권 안에 접어 넣고 가방을 잠갔다.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시영은 주머니 속 와이파이 도시락(에그)의 푸른 불빛을 확인해야 했다. 2016년의 제주는 포켓몬 GO가 유일하게 실행되는 해방구였으나, 화천강 사람들에게는 업무용 신호가 단 1초도 끊겨서는 안 되는 또 다른 테헤란로였다.
"최 변호사, 에그 신호 이쪽으로 좀 더 붙여봐요."
이준형 파트너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매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그는 게이트를 나선 순간부터 서울의 VVIP와 통화 중이었다. 시영이 반 걸음 옆으로 붙었다. 돌아보니 주니어들 서너 명이 각자의 에그를 들고 파트너들을 중심으로 반경 5미터를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호위무사처럼, 또는 기괴한 강강술래처럼. 제주의 자연경관보다 훨씬 더 초현실적인 군무였다. 저쪽 주니어 하나의 에그 불빛이 깜빡이자 일행 전체에 순간적인 내면의 공황이 번졌다. 이준형의 "좋아요"가 뚝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세 박자의 침묵.
그리고 해비치 호텔 로비에 도착할 즈음, 시영은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탈리아 장인이 정성껏 짠 린넨 셔츠는 제주의 습도 앞에서 완벽하게 무릎을 꿇어 있었다. 게이트를 나서기도 전에 이미 눅눅하게 절기 시작했던 셔츠는, 로비에 들어설 무렵에는 물에 젖은 골판지처럼 어깨선이 흐물흐물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싼 편안함'의 전시는 출발 십오 분 만에 굴복했다. 시영은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확인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거대한 유리 천장 아래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우윳빛 대리석 바닥에 부서지며 비현실적인 정적을 만들어냈다. 시영은 주위 변호사들의 복장을 살폈다. 말이 좋아 캐주얼이지, 하나같이 고가의 로퍼와 구김조차 계산된 슬랙스로 무장한 전시장 같았다. 이 공간에서 정장 타이를 풀었다는 것은 릴렉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여유를 증명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로비를 가로지르던 윤연경 대표의 서류 가방 잠금장치가 잠깐 풀렸다. 시영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그쪽으로 향했다. 가방 안감 한켠에 낡은 작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이 둘과 함께 찍은 것 같기도 했고, 그 옆에는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그린 낙서 한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윤연경 대표가 능숙하게 가방을 닫았다. 시영은 본 것을 본 것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32층 테헤란로의 포식자도 결국은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그에게는 그 어떤 법리보다 생소하게 느껴졌다.
체크인을 마친 주니어들이 로비 한구석에서 에그를 켜고 파트너들에게 신호를 상납하는 풍경 뒤로, 시영은 객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2층 테헤란로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를 제주의 파도 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오후 보고회 세션은 해비치의 지하 연회장에서 열렸다. 암막 커튼으로 제주의 바다를 완벽히 차단한 공간, 오직 빔프로젝터의 하얀 인광만이 변호사들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경쟁자들의 도전이 거칠어요. 우리가 이 풍경에 안주하는 순간, 강물은 썩기 시작합니다."
윤연경 매니징 대표가 잔을 들지 않은 채 무대 위에 서서 말했다. 그녀의 우아한 격려 뒤에는 주니어들의 상반기 실적을 낱낱이 훑는 서늘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시영은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숫자가 아닌 '구조'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준형 파트너가 눈을 감고 듣다가 아주 짧게 "좋아요"라고 뱉었을 때, 시영은 비로소 제주에 도착했다는 실감을 했다.
세션이 끝나고 올레길 4코스 걷기가 시작됐다. 그 전에 잠깐, 해변에서 멈춰야 했다. 홍보팀 담당자가 단체 사진을 요청했다. "화천강은 자유롭습니다"라는 문구에 쓸 사진이었다. 20명의 엘리트 변호사들이 해변에 일렬로 섰다. '가장 자연스러운 웃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각자의 안면 근육이 분투했다. 누군가의 볼이 씰룩거렸고, 누군가는 눈꼬리가 의도와 달리 올라갔다. 세 번째 촬영 시도에서 이준형이 "됐어요"라고 뱉고 먼저 걸었다. 담당자가 그 뒷모습을 재빨리 찍었다. 아마 그게 제일 쓸 만한 컷이 됐을 것이다.
해안도로에 접어들자 제주의 바람이 달라졌다. 바다 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돌풍이 시영의 린넨 셔츠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미 골판지가 된 셔츠는 차가운 바람 앞에서 아무런 방어막도 되지 못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걷던 시영의 옆으로 이준형 파트너가 묵묵히 걸어왔다. 잠시 뒤, 어깨 위로 무언가 툭 얹혔다. 고가의 윈드브레이커였다.
"거치적거리네."
이준형은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앞으로 걸었다. 시영은 윈드브레이커를 여몄다. 파트너의 체온이 아직 남아있는 안감이 어깨를 감쌌다. 제주의 해안 바람보다 확실히 묵직했다.
저 멀리 일행 가운데 신입 변호사 하나가 새 구두에 뒤꿈치가 까졌는지 살짝 절뚝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대놓고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일행 전체가 약속이라도 한 듯 아주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누군가는 현무암 너머 바다를 감상했고, 누군가는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제주의 바람 속에 낙오자를 만들지 않으려는 차가운 지성인들의 침묵이 조용히 녹아들었다.
"시영아, 문장이 무거우면 발걸음도 무거운 법이야."
현무암 돌담 옆 벤치에 앉아 낡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던 한 남자가 시영을 불렀다. 화천강에서 '문신(文神)'이라 불리는 별종 파트너. 시영보다 5년 먼저 파트너 자리를 꿰찬 선배였다. 그의 서면은 화천강 내부에서도 "법을 넘어서는 문학"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선배님, 여기서도 서면 생각 중이십니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보는 거지."
문신은 낡은 운동화를 탁탁 털며 바다를 가리켰다.
"저 파도를 봐. 저게 왜 수만 번을 똑같이 밀려오는지 알아? 이기려고 오는 게 아니라, 닿으려고 오는 거야. 문장도 그래. 마침표를 찍으러 가는 게 아니라, 다음 문장을 부르러 가는 거지. 네 논리가 다음 질문을 부르지 못하면, 그건 그냥 죽은 글이야."
시영은 문신이 바라보는 수평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파도는 현무암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화천강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자신만의 문법을 개척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저 초연함. 시영은 자신이 써 내려왔던 수많은 서면이 마침표에만 급급했음을 깨달았다.
자리를 뜨려는데 주머니가 진동했다. 문신 선배의 메시지였다. 사진 한 장과 함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이었다. 언제 찍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네가 파트너가 됐을 때 이 사진을 봐라. 그때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해야 하니까.
시영은 화면을 잠시 내려다봤다. 저장을 눌렀다. 그것이 전부였다.
한라산 소주와 흑돼지 연기
저녁 만찬은 야외 가든에서 열렸다. 자욱한 흑돼지 굽는 연기와 함께 제주의 맑고 독한 한라산 소주가 테이블마다 놓였다. 서울의 파인다이닝에서 마시던 와인과는 다른, 날것의 투명함이 화천강 사람들의 혈관 속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만찬이 시작된 지 채 삼십 분도 안 됐을 때, 식당 구석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칠순은 되어 보이는 식당 주인 할머니가 옆 테이블 손님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 중이었다. 건물주가 갑자기 임대료를 두 배로 올리겠다고 통보했다는 것, 계약서를 다시 들여다봤더니 자신에게 불리한 조항이 몇 개나 더 있다는 것.
이준형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는 할머니의 테이블로 조용히 걸어가 건너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정확히 3분이었다. 핵심 논점 세 가지. 지금 당장 해야 할 것 하나. 이준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명함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도움이 됐으면 됩니다."
할머니가 두 손을 모았다. 이준형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도 그 장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준형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시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했다.
윤연경 대표가 잔을 높이 들며 마지막 건배사를 던졌다.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지만, 결코 섞이지 않는 법이죠. 화천강이 바다가 되려면, 여러분은 각자가 독보적인 물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녀의 미소는 부드러웠으나 눈동자는 정교하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시영은 차가운 한라산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밤이 깊어지자 주니어들의 웃음소리가 리조트 정원을 가득 채웠다. 포켓몬 GO의 세계였다. 시영은 그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나무젓가락과 검은 수평선
편의점은 호텔에서 도보 칠 분 거리였다.
새벽 두 시, 잠이 오지 않아 혼자 걷던 시영은 파라솔 아래 이준형을 발견했다. 정장 재킷을 등받이에 걸고, 컵라면 뚜껑을 반쯤 열어 뜨거운 김을 식히는 중이었다. 화천강 시니어 파트너가 편의점 일회용 컵 위에 호호 입김을 불고 있었다.
시영이 멈칫했다. 이준형이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앉아요."
시영은 앉았다. 컵라면 하나를 더 집어 계산하고 돌아오는 사이, 이준형이 나무젓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시영이 받아들었다.
바람이 파라솔 가장자리를 흔들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낮게 깔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라면 국물을 들이마셨다.
"서울 가면 다시 전쟁이야."
이준형이 컵을 기울이며 말했다.
"지금 많이 먹어둬라."
그게 전부였다. 시영은 국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뜨거운 기운이 명치 아래까지 내려갔다. 저 앞 검은 바다 위로 어선의 집어등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서울의 한강 야경과는 다른 빛이었다. 더 고집스럽고, 더 낮았다.
라면 연기가 파라솔 아래를 천천히 채웠다. 화천강이라는 함선 안에서 같은 전선에 선 두 사람이 국물을 나눠 마시는, 그 기묘하고 묵직한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컵을 다 비울 때까지 그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테라스 유리문을 열자 검은 바다가 웅장한 포효를 내지르며 밀려왔다. 서울의 32층 사무실에서 보던 장난감 같은 한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밤바다의 짠내와 습기가 시영의 린넨 셔츠를 무겁게 적셨다.
시영은 난간을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성이 손바닥에 닿았다. 저 멀리 수평선에는 고기잡이배들의 집어등이 도심의 빌딩 숲처럼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이준형 파트너의 부재중 전화 표시였다. 시영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뒤집어 놓았다. 한참 뒤 다시 화면이 켜졌다. 아까 저장한 사진. 수평선을 바라보는 자신의 뒷모습이었다.
"난 잘하고 있는 거겠지?...."
나지막한 혼잣말이 바람에 섞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어둠 너머, 더 깊고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번엔 저 아래 모래사장이 아니라, 이 위에서 저 바다를 내려다보는 주인이 되어야겠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시영의 머리칼을 거칠게 흩뜨렸다. 멀리서 주니어들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점점 희미해져 갔다. 시영은 그 웃음소리에 섞이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바다의 맥박 소리에만 집중했다.
강물은 결코 뒤로 흐르지 않는다. 그리고 최시영이라는 강물은, 지금 이 순간도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 두 시의 제주에서, 컵라면 국물의 온기를 가슴 안에 담은 채로.
제주의 밤은 깊어갔고, 시영의 욕망은 검은 파도보다 더 높게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