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가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봉림은 카운터를 닦고 있었다. 걸레가 나무 표면을 훑을 때마다 낮은 마찰음이 났다. 봉림상회 특유의 냄새. 오래된 나무와 겨울 내내 쌓인 박스 사이에서 누군가 놓아둔 유자차 향이 섞여 있었다. 마봉림은 이 냄새가 언제 생겼는지 몰랐다. 어느 날부터 그냥 있었다.
위층에서 소리가 들렸다. “예... 예. 선고 결과요. 감사합니다.” 고필승의 목소리였다. 통화가 끊기는 침묵. 그다음엔 뭔가가 책상 위에 놓이는 소리. 그 소리가 끝나고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고필승이 멍하니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양세리가 다가와 그의 책상 위에 비타민 음료 한 병을 툭 올려두었다. 라벨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고필승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선배 건가요?” 양세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유통기한 임박해서 버리려던 거예요. 아까우니까 마셔요.” 양세리는 제자리로 돌아가 빠르게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고필승이 음료수 병을 돌려보았다. 라벨 뒷면에는 ‘2018년까지’라고 선명하게 찍힌 숫자가 있었다. 고필승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적이 흐르는 사무실 안, 고필승이 갑자기 주먹을 꽉 쥐며 벌떡 일어섰다. 승소의 기쁨을 온몸으로 누르고 싶었지만, 발끝이 움찔거렸다. 그는 가방을 챙겨 나가려다 거칠게 지퍼를 잡아당겼다. ‘치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가방 지퍼가 입고 있던 코트 끝자락을 꽉 물어버렸다. 고필승은 당황한 기색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지퍼와 사투를 벌였다. 낑낑거리며 지퍼를 당겨보았지만, 천은 더욱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결국 그는 코트를 입은 채로 가방에 대롱대롱 매달린 기괴한 자세로 문 앞까지 엉금엉금 전진했다.
그 꼴을 지켜보던 양세리가 서류를 넘기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고 변호사님, 승소 축하해요. 근데 그 가방, 고소할 건가요? 점유율이 상당한데.” 고필승은 한 손으로 가방을 지탱하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 이게... 협상이 좀 안 되네요. 가방이 기득권을 놓지 않습니다.” 양세리는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냥 포기하고 입고 가요. 그게 부암동 최신 패션이죠.” 고필승은 그 말을 또 곧이곧대로 듣고 “그럴까요?” 하며 가방을 멘 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봉림은 걸레를 멈췄다. 카운터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쪽 끝에 A4 봉투 하나가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그냥 봤다. 봉투 모서리가 여러 번 접혔다 펴진 자국이 있었다. 몇 번이나 꺼냈다가 다시 넣었는지 몰랐다. 서랍을 닫았다. 2006년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처음 이 건물 앞에 섰을 때, 마봉림은 크다고 생각했다. 크고 낡고, 그리고 무거웠다. 좋은 의미로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 이 건물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있어”라고만 했다. 마봉림이 더 물으면 “있다니까”라고 했다. 거기서 멈추는 사람이었다. 말을 아끼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구별이 안 됐다. 나중에야 알았다. 아끼는 거였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끼는 것.
부암동 오르막길 끝. 담쟁이가 반쯤 올라간 붉은 벽돌 건물. 아버지가 평생 갖고 있었던 것.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나무 계단이 삐걱거렸다. 아버지가 수십 년 밟아서 삐걱거리게 된 계단이었다. 2층 창문틀 끝에 손때가 남아 있었다. 닦으면 지워질 것들이었다. 마봉림은 닦지 않았다. 재판이 끝나면 닦으려고 했다. 끝나면.
마봉림이 창틀에 쌓인 먼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자, 먼지 위로 아버지의 뭉툭한 지문 조각들이 겹쳐 보였다. 그녀는 걸레를 든 손을 내리고, 대신 그 지문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만히 얹어보았다. 나무의 서늘함 대신 아버지가 평생 밀어 올렸던 삶의 온기가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아 그녀는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봉투들이 왔다. 처음엔 한 통이었다. 그다음 주엔 세 통. 일주일 후엔 우편함이 가득 찼다. 전화도 왔다. 모르는 번호에서 차분한 남자 목소리가 무언가를 설명했다. 마봉림은 그 차분함이 무서웠다. 화를 내는 사람은 피하면 된다. 차분한 사람은 피할 수가 없다. 봉투를 뜯었다. 읽었다. 이해되는 단어와 이해 안 되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이해되는 단어들만 골라 읽으면 하나의 문장이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우리 것이다. 마봉림은 봉투들을 서랍에 넣었다. 잠갔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걸을 때마다 열쇠 소리가 났다. 거슬렸다. 꺼내지 않았다.
변호사를 찾아간 건 이웃집 아저씨 소개였다. 성실한 사람이었다. 책상 위에 서류가 많았다. 마봉림의 봉투들을 받아 들고 한참 읽었다. 중요한 부분에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마봉림은 줄이 많을수록 안심이 됐다. 성실하다는 증거 같았다. “지급명령이 이미 확정됐거든요.” 변호사가 줄 그은 부분을 짚었다. “이의신청 기간을 넘겼어요. 상대방한텐 이미 강제집행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거예요. 우리 쪽에서 아니다, 라고 뒤집어야 하는 구조예요.”
“어렵다는 뜻이에요?” 변호사는 잠깐 생각했다. 볼펜 뚜껑을 닫았다. “어렵진 않아요. 다만... 상대가 확정된 거 들고 나오면, 이쪽에서 먼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해요.” 마봉림은 집에 와서도 그 말을 생각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우리가 먼저 증명해야 한다. 법이 그런 것인가 싶었다. 아닌 것 같았지만, 법이니까 그런 것인가 싶었다.
재판 날 아침에 마봉림은 옷을 두 번 갈아입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제일 단정한 걸 입었다. 단추가 있는 것으로. 1심 법정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방청석 의자가 단단했다. 나무 의자. 등받이가 직각이었다. 마봉림은 그 의자에 앉아서 변호사가 서류를 펼치는 걸 봤다. 많이 가져왔다. 절반도 꺼내지 못했다. 법정 안 공기는 어딘가 막혀 빠져나가지 않았다. 마봉림은 그 공기 속에서 내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재판장이 선고 날짜를 말했다.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소였다. 변호사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고 마봉림은 나중에 생각했다. 방향이 틀렸을 뿐이었다. 틀린 방향으로 얼마나 성실하게 달려도 결과는 같다.
2심 법정은 1심 법정과 같은 건물이었다. 다른 층이었다. 방청석 의자는 똑같이 단단했다. 재판장이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었다. 반백의 머리카락. 걸음이 빨랐다. 자리에 앉고 나서 기록을 폈다. 한참 말이 없었다. 옆에 앉은 판사들이 기록을 훑는 동안, 이 재판장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읽고 있었다. 그게 전부인데, 그게 달랐다.
그러다 상대방 변호사를 봤다. “채권의 발생 원인과 구체적 거래내역, 원본을 다음 기일까지 제출하십시오.” 짧았다. 그게 전부였다. 상대방 변호사가 뭔가 말하려 했다. 재판장은 이미 기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봉림은 나중에 그게 석명(釋明)이라는 걸 알았다. 재판장이 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 밝혀라. 원본을 내놓아라. 네 주장이 맞다면 근거를 보여라. 재판장에게 주어진 권한이었다. 말로 하면 쉬웠다. 그 말을 저 짧음으로, 저 표정으로 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기일이 끝났다. 또 다음 기일이 왔다. 기일과 기일 사이에 마봉림은 건물에 있었다. 1층 가게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아직 봉림상회라는 이름도 없던 때였다. 아버지 물건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밤에는 잠이 잘 안 왔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뭘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시간이어서였다. 마봉림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음 기일에 법정에 가서 방청석에 앉는 것뿐이었다.
들어올 때마다 뒤쪽 자리를 골랐다. 재판장이 잘 보이는 자리. 재판장은 매번 상대에게 물었다. 이 거래가 실제로 이루어진 증거는. 이 날짜에 이 금액이 오갔다는 기록은. 이 차용증의 원본은. 상대방 변호사는 매 기일마다 뭔가를 들고 왔다. 재판장은 매 기일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게 반복되었다.
마봉림은 그 얼굴을 봤다. 저 사람은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원래 저런 걸까. 표정이 없었다. 무표정한 사람은 보통 무심한 사람이었다. 이 재판장은 달랐다. 무표정한 얼굴 안에서 뭔가가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기록을 읽을 때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상대의 대답을 들을 때 펜을 쥔 손의 힘이 달라졌다. 마봉림은 여러 기일을 지나면서 그걸 알아챘다. 이 재판장은 이 기록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법정에서 차기준이 서류를 넘길 때, 마봉림은 보았다. 두껍게 제본된 판결 기록 모서리에 빼곡하게 붙은 작은 노란 포스트잇 조각들을. 그리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붉게 충혈된 눈가. 그가 어젯밤 어느 시각까지 이 먼지 쌓인 건물의 도면과 낡은 가계부 기록을 들여다보았을지, 마봉림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록을 쥔 그의 손가락 끝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마봉림의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것이 이상하다고 기록을 보며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방청석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냥 앉아 있었다. 대신 그 얼굴을 외웠다. 외우려고 한 게 아니었다. 보다 보니 외워졌다. 반백의 머리카락. 기록을 들여다볼 때 아주 조금 좁아지는 미간. 말이 짧고, 한 번 한 말을 두 번 하지 않는 것. 안심이 되는 쪽으로 무서웠다. 마봉림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 이긴 게 아니었으니까.
어느 기일에 감정 결과가 나왔다. 변호사가 설명해줬다. 문서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전문가가 판단한 것. 필적. 인영. 날짜 순서. 상대가 제출한 서류들이 처음부터 원본이 아니었다. 채권의 발생 원인을 입증하지 못했다. 변호사가 설명을 마쳤다. 마봉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 게 아니었다. 단어들의 뜻은 몰랐다. 그냥 알았다. 저쪽이 없는 걸 있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이 재판장이 그걸 찾아냈다는 것.
선고 기일에도 방청석에 앉았다. 주문이 낭독되었다. 원심판결을 취소한다. 피고의 강제집행을 불허한다. 이기는 건지 지는 건지, 마봉림은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변호사의 표정을 보고서야 알았다. 판결문을 받아 들었다. 두꺼운 종이. 글씨가 빽빽했다. 법정 밖으로 나와 계단 옆 구석에 서서 펼쳤다. 손이 약간 떨렸다. 마지막 페이지. 재판장. 차기준. 서명과 날인이 찍혀 있었다. 마봉림은 그 이름을 읽었다. 한 번. 또 한 번.
손가락으로 짚지는 않았다. 그냥 눈으로만 읽었다. 계단 어딘가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건, 다른 사람들. 마봉림에게 관심 없는 세계였다. 마봉림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기준. 그 이름은 서랍 안 봉투와 함께 부암동으로 왔다. 봉투는 바랬다. 이름은 바래지 않았다.
마봉림이 서랍을 다시 열어 그 판결문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판결문 종이 끝에는 10년 전 그녀가 소리 죽여 흘렸던 눈물 자국이 빳빳하게 굳은 채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낡은 종이 위에, 조금 전 2층에서 고필승이 소리 높여 전해준 오늘의 승소 통지서를 겹쳐 놓았다. 10년 전의 차기준이 지켜낸 정의와, 오늘의 고필승이 일궈낸 승리가 한 서랍 안에서 비로소 만났다.
2015년이었다. 셔터를 내리는 중이었다. 낯선 남자 둘이 건물 앞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 명은 키가 작고 부드러워 보였다. 말을 먼저 꺼낼 것 같은 사람. 다른 한 명은— 마봉림은 손을 멈췄다. 셔터가 반쯤 내려온 자리에서. 반백의 머리카락. 표정이 없는 얼굴. “임대 문의하러 왔습니다.”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마봉림은 셔터를 다시 올렸다. 끝까지. 체인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그게 전부였다.
사무실로 들어온 차기준이 창가로 다가가 2층 창틀 끝에 남은 짙은 손때를 발견했다. 그는 무심결에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그는 창틀을 닦는 대신 창문을 활짝 열어 부암동의 알싸한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10년 전 자신이 판결을 내렸던 그 여자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 낡은 건물이 버텨온 시간의 질감만큼은 존중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마봉림은 두 사람을 사무실로 들여보낸 뒤, 가게 문 앞 계단 제일 아래 칸을 손바닥으로 한 번 꾹 눌러보았다.건물의 붉은 벽돌은 기우는 오후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9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