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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Jan 16. 2016

명함까지 줬는데 내가 왜 뺑소니란 말이죠?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누군가 법을 들먹이며 위협하면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한때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한 경고장 남발 등이 바로 그 예이다. 경고장을 받은 학생 중 일부는 겁을 먹고 가출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잘못에 상응하는 정도를 벗어나 과도한 요구를 받게 된다면, 과연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 전문가로부터 상의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예상 외로 법을 앞세워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그 과정에서 부정한 이익을 취하려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     




비서인 혜민씨가 주춤거리며 방에 들어왔다.

무슨 일? 

혜민씨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혜민씨에겐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대기업 계열 SI회사 부장으로 재직 중인 열 살 위 언니가 있단다. 

“언니는 우리 가족의 자랑이에요. 결혼을 하지 않아 부모님이 좀 서운해 하시긴 하지만...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사람이죠.”


몇 년 내 무난히 임원 승진도 예상되는 실력파라고 했다. 그런 언니가 곤란한 상황에 놓인 것.


“언니는 자존심이 세서 자기 힘든 일은 가족에게도 얘기 안 해요. 그런데 이번 일은 본인도 감당이 안 되는지 제게 물어 보는데, 저도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변호사님. 집안 일로 부탁드리는 건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언니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서...”     


혜민씨 언니인 지원씨가 처한 상황은 이랬다.     




자신이 PM(프로젝트 매니저)을 맡고 있는 모 사이트 구축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살피기 위해 발주처가 있는 논현동 쪽으로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그 날 따라 큰 길이 막혀 네비게이션 지시를 무시하고 골목길로 급히 접어 들었는데, 갑자기 ‘쿵’ 하는 충격을 느끼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뭔가 부딪혔나...     


지원씨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문을 열고 내렸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자전거와 함께 쓰러져 있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얘... 괜찮니?”


지원씨는 아이에게 달려갔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릎을 툴툴 털고 자전거를 일으켜 세운 뒤 말했다. “괜찮아요”

지원씨는 불안했다. 아이의 몸을 여기 저기 살펴보며 물었다. “괜찮니? 진짜 어디 아픈 데 없어?” 

아이는 귀찮다는 듯 “괜찮아요. 아줌마. 저 지금 학원 가야돼요”라며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지원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함 두 장을 아이 손에 쥐어줬다.

“그래도 모르니까... 혹시라도 몸에 이상 있으면 아줌마에게 연락 줘. 알았지?”


“예.”

아이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전거를 끌고는 그 곳을 떠나갔다.     


지원씨는 차에 오른 뒤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방금 전 상황을 다시 복기해봤다. 골목길로 접어드는 입구에 과속방지턱이 있는 걸 보고 속도를 많이 늦췄으니 아이랑 부딪혔어도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휴... 이만하길 천만 다행이다.      




지원씨가 문자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3일 후.


하루에도 수십 통의 문자가 오니 제때 바로 확인을 하지 못한다. 오후 늦게 커피 한잔 하며 밀린 문자를 체크하던 중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가 전치 3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무런 보호조치 하지 않은 당신은 뺑소니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뺑소니는 특가법 제5조의 3에 따라 최소 징역 1년 최고 징역 5년형에 처해집니다.’     


지원씨는 왼쪽 가슴에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이게 무슨 말? 그리고 이 사람은 누구?’


지원씨는 컴퓨터를 켜고 ‘뺑소니’, ‘특가법’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몇 단계를 거치다보니 이런 조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에 관한 법률 제5조의3 (도주차량 운전자의 가중처벌) 

① 「도로교통법」 제2조에 규정된 자동차·원동기장치자전거의 교통으로 인하여 「형법」 제268조의 죄를 범한 해당 차량의 운전자(이하 "사고운전자"라 한다)가 피해자를 구호(救護)하는 등 「도로교통법」 제54조제1항에 따른 조치를 하지 아니하고 도주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가중처벌한다.     


1.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도주하거나, 도주 후에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피해자를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내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내가 뺑소니?
난 도망치지 않았는데?
아이에게 내 연락처도 줬는데.
어떻게 뺑소니란 말이지?’     



지원씨는 계속 맘을 졸이다 아무래도 직접 부딪혀 보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보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뒤 어떤 남자가 받았다.     


“저... 아까 문자 받았던 사람입니다. 누구신지...”


상대방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니 어쩌자고 그러셨습니까? 애가 다쳤어요. 애가!”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많이 다쳤나요? 어디를 어떻게 다쳤나요? 그 날 물어볼 때는 괜찮다고 했는데...”


“무릎이랑 허리, 다리에 다 문제가 생겼어요.
일단 약식으로 진단해 보니 전치 3주가 나왔는데,
앞으로 정밀 진단 해보면 진단이 더 나올 수도 있겠어요.”     

저런... 그때 병원에 데리고 가볼걸. 후회가 밀려왔다.     


“전 그 애 삼촌입니다. 애가 저녁 때 집에 들어와서 아프다고 끙끙대길래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봤죠. 애가 그 쪽 명함을 주더군요.”     


아, 일이 그렇게 된 거구나.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치료비나 다른 피해배상을 하겠습니다.”     




상대방 남자는 갑자기 말투가 거칠어졌다.     


“이 양반 우릴 무슨 가난뱅이로 아나? 돈 몇 푼 던져주면 된다 이거요? 대기업에 다니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우습게 보여? 그런 거야?”     


지원씨는 숨이 턱 막혔다.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성지원씨! 똑똑히 들으라구. 내가 문자에 보낸 것처럼 당신은 이미 뺑소니를 친 거야. 특가법에 따르면 당신은 징역형이야! 징역형!”     


지원씨는 억울했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전 ‘뺑소니’를 친 게 아닙니다. 아이에게 제 명함주고 아프면 연락하라고 했어요. 조카에게 물어 보세요.”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흥! 주위에 물어봐요.
교통사고 내고 그냥 명함만 던져 주고 간 경우에도 뺑소니로 된다구.
당신, 법을 잘 아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큰 소리야!
나중에 다시 전화할 테니 그 전에 좀 더 알아보쇼!”

남자는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지원씨는 다시 ‘뺑소니’라는 검색어로 자료들을 더 찾아봤다. 


놀랍게도 자기처럼 사고를 일으키고 피해자에게 명함을 건네고 간 경우에도 나중에 뺑소니로 처벌된 사례가 여럿 있었다. 운전자는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필요한 ‘구호조치’를 해야 하는데 그냥 연락처만 주고 간 경우에는 필요한 ‘구호조치’를 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단다.      


지원씨는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분명 제 잘못입니다. 사과드립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지원씨가 정중히 사과하자 남자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새 알아본 모양이군. 그래요. 당신도 재수 없었던 거지 뭐. 빨리 이 일을 종결지읍시다.”


“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말씀 주세요.”


“알겠소. 조카가 몸을 다친 건 사실이고,.. 이 녀석이 앞으로 축구선수를 하려고 준비 중인데 이번 사고로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된 거라서, 내가 형님, 그러니까 애 아버지랑 얘기를 해봤는데, 현재 치료비랑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피해배상까지 다 합쳐서 3,000만 원 정도면 원만히 합의가 될 것 같은데...”     


3,000만 원?     


지원씨는 깜짝 놀랐다. 별로 세게 부딪히지 않은 것 같은데 3,000만 원이라니...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저기... 제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3,000만 원은 좀 아닌 것 같아서... 합리적인 선을 제시해 주시면...”     


남자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합리적? 당신 지금 합리적이라고 했소? 당신 아들이 그렇게 다쳤다고 생각해봐. 이 양반 이거 안 되겠네. 당신 큰 회사 다니지? 거기 인사규정 보라구. 징역형 이상 형 받으면 아마 당연면직될 걸? 쉽게 말해서 잘린단 말야. 내가 당신을 특가법 위반죄로 고소하면 재판 받게 되고 그럼 최소 징역형이야.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고 당신 직장이 걸린 문제야. 내가 그 모든 걸 다 감안해서 신경 써주려 했더니 안 되겠네? 나 기분 상했으니 다음에 통화하자구!”     


남자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뭐라고? 당연면직? 인사규정?’




지원씨는 인트라넷에서 회사규정집을 다운로드받았다.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인사규정. 거길 보니 남자 말대로 징역형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당연면직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어떻게 쌓아온 커리어인데...’


그 남자는 이틀에 한 번씩 지원씨에게 전화를 걸어 돈이 마련됐는지 계속 채근했다.     




혜민씨 이야기 속에서 나는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 남자의 접근방식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났다.     


나는 혜민씨로부터 지원씨 번호를 받아서 지원씨와 통화했다.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목소리였다.


“지원씨, 이 남자와 제가 직접 통화해볼게요.”


“... 괜찮을까요? 혹시 그 사람이 기분 나쁘다고 고소라도 해 버리면... 어떻게 하죠?”


“제가 요령껏 해볼게요.”     


나는 지원씨가 알려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전 성지원씨 사촌오빠 되는 조우성 변호사라고 합니다.”

“네? 변호사...라구요?”


언짢음인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조카분 일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 동생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더군요.”

“아...네... 그건 그렇죠.”     


“조카분이 전치 3주라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진단명이 어떻게 돼나요? 골절인가요? 염좌인가요? 아니면...”

“아... 그건... 진단서를 다시 봐야... 됩니다. 분명 3주, 3주 맞아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저... 가능하면 아이 아버지와 직접 통화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미성년자이니 친권자인 아버지에게 법정대리권이 있지 삼촌은 법정대리권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법조문을 들먹였다는 점을 전해 들었기에 나도 일부러 법적인 용어를 구사했다.      




“아니, 뭐, 법정대리 그런 건 아니어도 애 아버지가 저더러 이 문제를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좀 이상합니다. 전치 3주라고 하면서 동생에게 진단서를 보여주지도 않았더군요. 거기다 배상금 3,000만 원은 무슨 근거인지 변호사인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아... 배상금 그거야 서로 타협하면...
좀 조정할 수도 있는 문제구요.”


어라? 조정?

아무래도 수상하다. 좀 더 세게 밀어붙여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3,000만 원 안주면 형사고소해서 동생이 회사에서 잘리게 하겠다 라고 했다면서요? 동생이 녹음을 다 해놨습니다. 그 행위는 형법상 ‘공갈죄’에 해당됩니다.”      


“아니, 변호사 양반.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우잉? 반말?     


“잘 들으세요. 제 동생이 사고 후 제대로 조치하지 않은 점에 대해선 처벌받으면 됩니다. 아시겠지만 특가법 제5조의 3 위반죄는 징역형 말고 벌금형도 있어요. 제 동생은 전과도 없고 현장에서 명함까지 주고 왔기 때문에 제가 변호하면 벌금형이 될 확률이 큽니다. 그런데 마치 징역형을 받을 것을 전제로 겁을 줬잖아요?”     

“그럼... 서로 양보해서... 1,000만 원에 합의하면 어때요?”


이 정도면 뭐 더 볼 것도 없다.      


“한 시간 이내로 제가 불러주는 번호로 아이 진단서 사진 찍어서 보내세요. 만약 진단서 안보내면 당신을 협박, 공갈죄로 고소할 겁니다. 한 시간 내로 진단서 보내지 않으면 바로 법적조치 들어갈 거니 알아서 하세요.”  

   

왠지 마지막 통화가 될 것 같아 애써 아껴둔 한 마디를 점잖게 얹었다.


“그리고 자꾸 반말 하지 마.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난리를 치고 나서 30분 뒤. 남자는 내가 아닌 지원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서로 재수 없는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하고 없던 일로 하자, 그 성격 고약한 변호사 오빠에게도 전해 달라. 앞으로는 더 이상 전화하지 않겠다고...     


“변호사님, 어찌 된 일인가요? 진짜 이대로 끝날 수 있나요?”


지원씨는 내게 그 소식을 전하며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진짜 피해자 가족이라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추측이지만 남자는 그 날 현장에서 우연히 사고를 목격하고 아이로부터 명함을 확보했을 것이다. 명함에는 지원씨 인적사항이 다 들어 있으니 충분히 협박 시나리오를 짤 수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나는 비서 혜민씨에게 체면이 서서 다행이었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법 지식'을 악용하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줄 수 있을지 생생하게 경험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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