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위기’에 몰린 ‘벼랑’ 끝의 ‘절박’한 청년시대
대선을 앞두고 이런 종류의 글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나 따위의 의견이 무슨 반향을 일으킬 수도 없지만, 또 어느 편이든 무게 중심이 기울 수 있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약간의 조심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내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입만 열면 청년을 이야기한다. ‘절망’ ‘위기’ ‘벼랑’ ‘절박’…… 뭐 대충 이런 수식어를 사용하여 청년들을 표현하고 그 대안을 마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정말 ‘절망’ ‘위기’ ‘벼랑’ ‘절박’의 청년시대인가?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은 거의 이 수식어가 맞다.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몇 년도 아니다. 아주 오래된, 어쩌면 2000년대를 접어들면서부터 나타난 우리 사회의 보편적 문제였다.
문제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여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임시방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안다.
무수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이념적 성향에 따라 그 원인은 좀 더 다양하게 분화한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다. 구조라고 하니 뭔가 애매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 경제, 문화가 사회의 구조를 만들고 다시 그 구조가 정치, 경제, 문화의 방향을 결정한다. 순환하는 것이다. (여기에 외부 요인도 있다. 구조 문제는 우리나라 내부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치! 참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불합리와 부조리의 결정체다. 정치행위를 하는 당사자나 그 행위의 대상자인 우리나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환경에서 나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 정치의식이 낮으니 낮은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 피해는 역시 우리가 고스란히 받을 뿐이다.
문제는 이 정치행위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경제도 운용된다는 것이다. 비록 관료들에 의해 통제되는 시스템이지만 그 시스템을 제어하는 것은 법이다. 그 법을 우리나라에서는 국회가 만든다. 국회는 정치적 행위의 집합체다. 정치적 의사결정으로 만들어진 법에 의해 우리의 경제 상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문화는 경제적 토대 위에 이루어진다. 문화 자체가 경제고 경제 행위가 문화의 방향을 좌우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를 테면 잘못된 정치 행위는 잘못된 문화로 확산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물론 제어 장치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잘못된 정치의 영향은 이런 제어 장치의 효과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지난 세월 동안 실제로 보아왔다.
현재 청년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낀 것은 ‘절망’과 ‘위기’에 몰린 ‘벼랑’ 끝의 ‘절박’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서 느낀 것이지 현재 여야의 정치꾼들이 스스로 알아낸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대선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니 이런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청년들의 표를 얻고자 함이다. 뭔가 장미 빛 대책을 내놓고 그것으로 해결될 것 같은 믿음을 준 뒤 표를 얻고 선거에 이기면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종료될 것이라는 데 분명한 근거가 있다. 우리 정치가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돈을 들여서 하는 정책은 그 돈의 지출 방향에 정책의 성패가 달려있다. 지금 상황에서 내놓는 정책은 장기적인 전망을 보고 투자하지 않는다. 그것은 10년 20년 뒤에 성과를 내 일이기 때문에 선거 전략으로는 가치가 없다. 우선 효과를 낼 수 있는 곳에 돈을 쓴다. 당장은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돈줄이 약해지면 문제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상황이 되기 일쑤다. 그간의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통령 5년 임기 안에 효과가 없는 정책을 쓰지 않는다. 장기적 전망이나 대안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선거판에서는 쓸모가 없다.
이런 일이 사실은 해방 이후 계속되었고 그 후유증이 지금 우리 사회를 누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청년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 자신의 아이들은 대부분의 청년들이 겪는 문제를 겪지 않고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받는 청년들의 문제는 솔직히 먼 이야기다. 다만 선거철에 필요에 의해 말의 성찬을 보여 줄 뿐이다.
나는 정치학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60년을 살다 보니 정치학을 배우지 않아도 최소한 정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획신한다. 정치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법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잔 꾀를 정치로 오해하고 있다. 하여 이런 말이 생각난다.
Politics without Authenticity is in vain. (진정성 없는 정치는 공허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선거판에 뛰어든 지인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일단은 이기기 위해 뭐든 못하겠나?” 이 말의 이면은 이렇다. 전망도 가능성도 모두 뒤로 하고 오로지 당선을 위해 움직인다. 참 쓸쓸한 이야기다.
그림은 영국화가 Emily Mary Osborn의 그림이다. 제목을 보라! "이름도 없고, 연줄도 없는..."
Emily Mary Osborn, Nameless and Friendless. Oil paint on canvas. 103.8 x 82.5 cm.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