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니 올해도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다. 아침에 교무실에 들렀더니 선생님들 모두 생기부를 쓰고 계셨다. 어제는 지원청에서 생기부 점검을 했다. 일 년의 마무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30년을 넘게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였다. 예전엔 딱 한 장으로 된 시절도 있었다. 앞 면엔 인적사항과 장래희망 정도가 있고, 뒷면에는 각 학년 성적(평어, 즉 수우미양가로 단촐하게 표기된)과 교사의 최종 평가 한 마디가 전부인 그야말로 간단한 생기부였다. 당시는 육필로 쓰는 것이어서 글씨가 조금 좋았던 나는, 다른 반 생기부도 자주 써 드린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NEIS라는 괴물이 학생의 모든 것을 기록하게 한다. 출력을 해 보면 일반적으로 10페이지(A4 기준) 내외이지만 많은 경우 20페이지를 넘는 경우도 있는데 지금도 이 생기부가 중요한 입시에서는 분량이 내용을 압도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다.
NEIS 법제화를 막아내기 위해 전교조 교사로서 항의하는 철야집회를 하다가 근태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학교는 NEIS가 지배하게 되었고 이제는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진다. 순기능도 없지는 않다. 학생의 학교 생활의 추이를 확인하는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기록하는 교사에게 요구되는 끝없는 에너지다. 인문계 고등학교(도시지역 대규모 학교) 교사만 한정해 놓고 상황을 분석해보자. 일단 주당 18시간(50분) 내외의 수업을 한다. 더러는 방과 후 수업까지 하면 20~22시간 정도로 수업이 늘어난다. 일주일 5일 근무로 잡으면 2~3일 정도는 5시간 수업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경험 상 그런 날은 녹초가 된다. 생기부를 작성해야 하는 이런 시기에는 수업이 조금 적은 날, 일을 몰아서 한다. 쓸 것도 쓸 내용도 다양하고 많다. 이곳저곳에 작성을 하다 보면 빠지는 곳이 있다. 흔히 생기부 작성이 숨은 그림 찾기에 비유하는데 그만큼 복잡한 하위 메뉴들을 가지고 있다. 여러 선생님들과 비교하고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기록을 빠뜨릴 수도 있다.
그런데 생기부에 쓰는 내용은 거의 평소 학교 생활의 기록이다. 구체적으로 수업 장면에서 학생이 수업 상황에 어떻게 활동하고 기여했는지가 매우 중요한 기록의 대상이다. 교사는 그러한 과정을 평가하고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수업이 학생 활동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대규모 인문계 고등학교 수업을 매 시간 학생 활동 수업으로 채우기에는 교사의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일부 교사는 모든 수업을 학생 활동 중심으로 디자인하여 진행하는지 몰라도 나의 경우에는 3 단위(주당 3시간) 과목의 경우 일주일에 1시간 정도 그런 수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다가 학생들의 행동 발달에 대한 기록은 담임으로서 자기 반 아이에 대한 기록이다. 늘 아이들을 관찰해야 함은 교사로서 당연하다. 하지만 교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주당 18시간 수업을 전체적으로 디자인해야 하고 그 내용을 매 수업 후 기록하여야 하며 그것을 다시 정리하여 생기부에 기록하여야 한다. 여기에 담임으로서 자기 반 학생(30명 내외)의 행동 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하여야 하는데 가끔씩 교사로서 한계를 느낀다.
거기에다가 부가적으로 자동봉진(자율, 동아리, 봉사, 진로)에 대한 기록도 빠뜨릴 수 없다. 이렇게 각 부분마다 기록이 되면 비로소 종합적인 평가를 쓰는 란이 기다린다. 이것은 전체적인 총평에 가까운데 자칫 부정적인 용어가 사용되기라도 한다면 한 학생의 고등학교 생활이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기록하여야 한다. 그나마 최근에는 글자 수의 제한이 있어 길게 쓰지는 않는다. 점점 더 간소화되고는 있다. 하지만 그 基底(기저), 즉 학생을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교사들은 다시 학교의 업무를 해야 한다. 업무 덜어내기와 간소화가 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지만 아직도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면 분명하지 못한 업무들이 교사에게 걸쳐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학생을 제대로 가르치고 키워내려면 교사는 학생들 수업에만 집중하여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은 갈수록 세밀하게 분화하여 교사들의 일상을 누른다. 학교 밖 사람들은 학교와 교사를 평가하면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의 일로 전체를 재단해 버린다. 아쉽고 안타깝고 때론 서운하다.
사실 이런 일들은 학교급이나 규모와는 관계없이 전체 교사들에게 다가오는 무게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다하는 선생님들에게 존경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