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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无首吉'을 생각하다.

by 김준식

이 아침 无首吉을 생각하다.


주역 상경(주역 건괘 용구)에 ‘无首吉(무수길)’이라는 말이 나온다. 좋은 말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우두머리가 없으면 길하다’라는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用九 見群龍 无首 吉 (용구 견군룡 무수 길)

용구는 여러 용 가운데 우두머리가 없는 것이니, 길하다.”


좀 더 자세하게 풀이한 周易正義(주역정의; 당나라 때 편찬한 주역 해설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사실 이 책 풀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用九見群龍’者, 此一句, 說乾元能用天德也. 九, 天德也.

‘용구견군룡’이라는 이 말은, 하늘의 형통함(乾元)은 능히 하늘의 덕을 능히 사용함이고 구는 하늘의 덕이라. (九는 완전함을 뜻한다.)


若體乾元, 聖人能用天德, 則見群龍之義.

만약 하늘의 형통함을 실천(體)하여 성인이 천덕을 능히 쓴다면 이는 여러 용의 뜻을 보는 것이다.


群龍之義, 以无首爲吉,

여러 용의 뜻은(여러 용으로 표현한 참 뜻은) 우두머리가 없어(서로 앞섬이 없는) 길하다 이니


故曰“用九見群龍, 无首, 吉”也.

따라서 이르기를 용구는 여러 용을 본다는 것이니 이는 우두머리가 없음이요 이것은 길하다. “(해석의 차이는 인정함)



고대 동양에서 龍은 천지 변화를 주도하는 靈獸(영수)다. 따라서 용을 왕 또는 황제에 비유했다. 현대적 비유로 한다면 용은 리더다. 그런데 군룡이 나타났으니 리더가 여러 명이라는 이야기이고 뭔가 좋을 것도 같은데 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无首(무수), 무리로 나타난 용들이 서로 앞서거나 뒤처짐 없이 움직일 때 좋은 징조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 리더이고자 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어떤 경우에는 모두 리더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강박적으로 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교육과 관행이 가져온 폐해다. 앞서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말은 서양에서 생겨난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오래된 그리고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유물이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여전히 그것이 통용되는 곳은 서양도 아니고 동양의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다.


리더는, 위에서 말한 주역에 의하면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 하늘은 지금의 가치관으로 바꿔 해석하면 ‘자연스러운 과정’ 전체를 비유하는 말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람들의 모임에서 모든 조건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그 모임을 이끄는 존재가 어쩌면 리더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리더가 여럿이고 그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는 상황이 바로 주역의 무수길인데……


21세기 대한민국은 이 무수길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정권이 바뀌면서 노동자는 다시 머리띠를 졸라매고 거리로 나서야 하고, 전쟁의 위협에 그나마 생겼던 남북통일의 기운이 스러지고, 교육은 다시 수월성에 모든 것을 걸 태세다. 즉 하나의 지극히 인위적인 리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매끈하고 비정한 피라미드 구조를 우리는 다시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즉 有首(혹은 多首) 不吉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두머리가 없는 완벽한 평등 세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각자에게 있는 능력과 소신과 의지가 존중되는 평등, 그 평등이 무리 없이 타인과 조화되는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리더를 믿음으로 지지해주는 세상...... 점점 물 건너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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