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지난 봄 날 호수다.
흐린 날 아침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출근길에 보는 동네 저수지는 갈수록 말라가는데 비 같은 비는 좀체 내리지 않는다. 하늘이 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한 응당한 처분 인지도 모를 일이다.
출근길 30분 동안 생각이 미치는 범위는 사실 그리 넓지 않지만 의도적으로 늘 새로운 생각을 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그 생각의 범위는 결국 나의 인식 범위를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때로 인식의 범위의 경계지점에 와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지점이 있기도 한다.
그 지점에서 독서와 그 독서에 대한 생각이 나의 지평을 손톱만큼 더 넓히게 된다.
독일의 니체는 그의 책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번역하자면 차라투스투라<우리가 아는 조로아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전부 그리고 전부가 아닌 것을 위한 책)
이 책 제목에서 애매한 부분은 'Keinen'이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None', 'not any' 정도로 번역이 된다. 즉 없음, 아무것도 아닌 등으로 해석되는데……앞에 있는 'alle(전부)'와 대등한 관계로 보아 ‘전부가 아닌’으로 해석하자니 전부가 아닌 것을 위한 책이라면 누굴 위한 것이지? 오로지 자신인가? 아니면 그 조차도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붙들고 거의 한 시간을 소비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사자가 되고 그리하여 사자가 아이가 되는지를,”(《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그린비, 2003)
나름 해석을 해 보자면 낙타는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존재로서 인내의 상징이다. 우리는 늘, 이 인내심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역으로 우리에겐 인내심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낙타의 입장이 되어보자. 낙타는 엄청난 고통을 견디게 된다.(사실 이 관점도 인간의 관점이기는 하다.) 가끔씩 낙타는 더 이상 의무감과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 짐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자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즉 사자의 용기가 필요하다.
무능한 낙타에서 용맹하고 포악한 사자로 탈바꿈하는 일이 만만하지는 않지만 자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용맹함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여기서 또 다른 용의 비유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빼고)
사자에서 다시 아이가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니체는 이렇게 아이의 성격을 규정한다. 아이는 순수하며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것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 하여 아이는 수레바퀴처럼 돈다. 즉 아이는 기존의 질서와 도덕을 잊어버리고 언제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이들에게 노는 것이 곧 삶이다. 이것을 하다가 지겨우면 또 저것을 하지만 큰 범위에서 보면 바퀴처럼 순환한다. 그리고 지치면 자고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잔다. 오로지 본능에 충실하다.
니체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삶 전체가 이런 과정들의 연속, 즉 낙타였다가 사자가 되고 다시 아이가 되는 과정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변화가 진행형인지 아니면 단지 묘사인지 그것도 아니면 관찰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잠언처럼 암시 혹은 계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득 우리의 현실과 니체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아침이다. 우리는 낙타인지 사자인지 아니면 아이인지 그도 아니면 그 중간 어디쯤에서 변하지도 못하고 그저 소멸해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