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비범한 인물들이 많다. 하지만 비범함은 늘 위험하다. 평균을 넘는 지식과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畏敬과 嫉視의 대상이 된다. 오늘 어떤 비범함을 보며 ‘공자’를 쫄게 만든 ‘노자’를 생각한다.
‘사마천’의 『사기』 ‘노자한비자’ 열전 제3 “老子脩道德, 其學以自隱無名爲務. 居周久之, 見周之衰, 迺遂去. 至關, 關令尹喜曰: ‘子將隱矣, 彊爲我著書.’ 於是老子迺著書上下篇, 言道德之意五千餘言而去, 莫知其所終.”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았으며, 그의 학문은 자신을 감추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힘썼다. 오래 주나라에 머물다가 주나라가 약해지자 마침내 떠나기로 했다. 관문(일종의 국경검문소, ‘노자’의 지역과 관련된 국경검문소로는 ‘함곡관’이 있다.)에 이르자 그곳을 지키던 수문장 ‘윤희尹喜’가 말하였다. ‘선생이 은둔하려는 것 같은데, 저를 위해 글을 남겨주시길 간청합니다.’
이에 노자는 마침내 상하편의 책을 썼는데, ‘도덕道德’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약 5천여 자의 글을 남기고 떠났으니, 이후 아무도 그의 종적을 알지 못한다.”
이를 테면 주나라의 국립도서관장을 맡고 있던 ‘노자’라는 사람이 국운이 기우는 조짐을 보고 멀리 변방 밖으로 은둔하려고 가던 길에 ‘윤희’라는 관문지기에게 5천여 글자의 책을 남겼다는 것이다.
『도덕경』의 구성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성립 연대 및 실질 저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는 ‘도는 언제나 ‘무위’(無爲-무엇인가를 하지 않음)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이를테면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 등의 기준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道’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유가 사상’(‘공자’의 가르침)과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학자들 마다 관점의 차이가 있지만 『도덕경』과 ‘유가 사상’의 발원지와 무관하지 않다. ‘유가 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 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도덕경』의 ‘무위자연’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쯔강 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규칙이 많고 강하며 지킬 것을 강요한다. 반대로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조건이 순조로워 삶의 태도 또한 자연스럽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다. 따라서 규칙도 작고 또 느슨하며 사람들은 누군가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유가나 도가사상의 형성에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해석이다.
‘노자’는 주나라(춘추 전국 시대 이전)에서 수장실의 관리였다. 여기서 말하는 ‘수장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립도서관 정도의 기관이었다. 고대에 책은 매우 귀한 물건이었고 왕이나 귀족들만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의 ‘수장실’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일 수는 없고, 학식이 매우 높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현자였을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당시 높은 학식과 지혜로운 현인으로 인정받아 주나라 왕실의 국립도서관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노자’가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하여 질문했다는 이야기로 확인할 수 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역시 ‘사마천’의 『사기』 ‘노자한비자’ 열전 제3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老子曰: ‘子所言者, 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耳.… 吾聞之, 良賈深藏若虛, 君子盛德, 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孔子去, 謂弟子曰: ‘鳥, 吾知其能飛; 魚, 吾知其能游; 獸, 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罔, 游者可以爲綸, 飛者可以爲矰. 至於龍吾不能知, 其乘風雲而上天. 吾今 日見老子, 其猶龍邪!’”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관해 물었다. ‘노자’가 대답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나 그 뼈나 이미 모두 썩어 사라졌고 단지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상인은 좋은 물건은 깊이 감추어 마치 없는 것처럼 하고, 덕이 높은 군자는 그 용모가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처신한다고 하였소. 그대의 교만한 기색과 많은 욕심을 버리도록 하게….” ‘공자’가 돌아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새는 날아다니는 것을 내가 알고 물고기는 헤엄치는 것을 알며 짐승은 달린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달리는 것은 망(덫)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로 낚을 수 있고, 나는 것은 주살(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에 있어서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오늘 ‘노자’를 보니 바로 용과 같았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는 얘기는 역사적 사실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한나라 초기 시대에는 이 이야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사람들은 춘추시대 말기에 ‘노자’라는 지혜로운 노인이 있었고, 당대의 석학 ‘공자’가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자신의 철학이 천하의 혼란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30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등용해 줄 군주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늘 상갓집 개와 같은 신세였다. ‘노자’가 볼 때 이러한 ‘공자’의 모습이 측은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공자’에게 너 자신부터 닦는데 힘쓰라고 충고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공자’가 본 ‘노자’는 한 마리 용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용의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로움 그 자체인 존재이다. 이와 같이 ‘노자’는 제법 식견이 높았던 ‘공자’ 같은 사람에게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