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 산책(26)

by 김준식

노자도덕경 산책(26)


‘노자’와 ‘장자’ 사상에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말(언어)’의 부조리와 부정확성이다.


특히 ‘장자’는 『莊子』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언어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자'는 언어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도 '장자'는 끊임없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생각을 전하고 있다. 한계성을 지닌 언어를 통해 그 한계성 너머를 사유하게끔 하려는 '장자'의 노력은 책을 읽는 내내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장자'에게 있어 '말言'이란 무엇이었을까?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함으로써 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그 소통의 중앙에 '말言'이 존재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말言'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며 그 한계성이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장자’는 끊임없이 말에 집착하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말(言)' 자체에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사용하여 그렇게 된 것일 뿐인 '말(言)'로 우리는 자연自然을 파악할 수 있을까? '장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자연의 모습이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노자’ 또한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노자가 먼저인지 장자가 먼저인지는 현재 학설이 다양하다. 여기서는 누가 먼저인지는 무관하다.)


知者, 不言, 言者, 不知. 『도덕경』 56장 앞부분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도덕경 1장 ‘道可道 非常道’와 그 맥이 닿아있다. 즉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도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니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무엇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즉 동사적 자연의 변화를 명사적 개념의 '말(言)'로 담아낼 수는 없다. ‘말(言)'로 표현되는 그 순간, 이미 표현된 그 외의 다양한 이미지는 잘려 나간다. 거대한 진행의 과정 속에 있는 자연의 변화를 어느 한순간을 포착하여 '말(言)'로 담아내어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즉, 우리가 '말(言)'을 통해 도道를 인식하는 것은 뚜렷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함부로 안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만다.


뒤이어


塞其兌, 閉其門 『도덕경』 56장 중간

구멍을 막고 문을 닫아야 한다. (여기서 兌는 구멍이라는 뜻이다.)


구멍이나 문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말한다. 즉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일단 그 자극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 부분은 ‘장자’ 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莊子』 응제왕 마지막 부분의 혼돈의 죽음이 매우 흡사하다. 남해의 황제 ‘숙’과 북해의 황제 ‘홀’이 일주일 동안 중앙의 황제 ‘혼돈’에게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주었더니 마지막 날 ‘혼돈’이 죽고 말았다.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일착일규 칠일이혼돈사) 『莊子』 응제왕


구멍을 뚫어서(감각을 느끼게 해 줄 의도로 뚫은) 죽은 혼돈의 이야기와 감각기관을 막아야 현동에 이른다는 말은 비슷한 구조에서 나온 말이다.


玄同(현묘한 같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玄은 理之妙(이지묘), 즉 논리가 정교하고 미세하다는 의미이니 이것이 같다(同)는 말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논리도 모두 융섭(融攝)되는 지극한 경지를 말한다. 구멍을 닫으니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의 간섭 없이 본질(즉, 도)에 가까워지니 그것으로부터 완전한 같음에 이른다는 이야기와 이미 그런 완벽한 상태에 있는 혼돈에게 다시 구멍을 뚫어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니 완벽했던 현묘한 도가 마침내 깨지고(혼돈의 죽음) 말았다는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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