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의 첫인상
영국의 영어학 교수이자 작가이며 동시에 고언어학자였던 툴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은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룩 칼리지에서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고대 영어학 교수로, 1945년에서 1959년 사이에는 같은 대학 머튼 칼리지의 영어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지의 제왕은 그의 실마릴리온(The Silmarillion) 세계관 중 제3 시대의 이야기다. 2001년 피터 잭슨에 의해 처음 실사 영화화되어 개봉한 '반지의 제왕 1편(반지원정대)' 이후 일 년에 한편씩 3년을 기다려 마지막 편인 '왕의 귀환'을 본 소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3편 마지막 대목에서 주인공 ‘프로도’와 그의 시종 ‘빌보’는 서쪽 바다로 건너가 불사의 땅으로 간다. 엄경근 화백이 나에게 준 그림을 보면서 나는, 배를 타고 떠나는 반지의 제왕 마지막 장면과 그 배경이 떠 올랐다.
2. '달빛' 혹은 '조각 달'
엄경근의 작품에서 '달 빛'은 매우 특별하다. 대부분의 그림 속에 달이 있다. '낮 달', 혹은 '초승달', 그리고 '그믐달' 혹은 '보름달'까지 다양한 달 빛이 그의 그림 안에서 환한 빛을 밝히고 있다.
화가 엄경근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달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인간들의 오랜 벗이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달을 노래했고 달을 묘사했지만 달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실체다.
하여 여전히 그리고 끊임없이 글로 또는 그림으로 달은 묘사된다. 엄경근이 묘사하는 달은 페이소스(파토스)이거나 혹은 '표연飄然', 또는 '초월超越'의 이미지로 사용된다.
이 그림의 달은 '그믐달'이다. '그믐달'은 새벽에 뜬다. 그림에 있는 정도의 '그믐달'이면 거의 오전 1시~2시 사이에 뜬다. 그 고요한 새벽에 허공에 떠 있는 달은, 염경근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숲 사이로 난 작은 수로를 비추는 달빛에 반사된 환한 빛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든다. 그림으로 묘사될 수는 없지만 청결하고 신비한 바람이 물 위를 지나 달 빛을 휘감고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상상해 본다.
엄경근의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면 다양한 의미를 가진 객체들이 혼재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알레고리(Allegory)’가 생겨난다. ‘알레고리’란 문학적 용어로써 굳이 해석하자면 ‘은유(Metaphor)’보다는 더 길게 지속되며 보다 충만한 잠재 의미(함의)를 뜻하는 말이다.
이 그림에도 숲에서 나온 수로와 입구의 두 그루의 나무줄기가 만들어낸 門의 이미지가 화면 중앙에 있다. 달 빛은 경계 없이 드나들지만 인식의 존재인 인간에게는 그것이 나아감과 들어옴의 이중적 이미지를 줄 수밖에 없다.
이 글 첫 부분에서 나는, 이 장면을 나아감(배를 타고 떠나는)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그림을 보면서 달빛을 받고 육지로 돌아오는 이미지를 상상할 수도 있다.
나무줄기에 있는 밝은 점 역시 이중적 이미지의 객체다. 화가 본인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달 빛에 반사된 밝은 점은 꽃이거나 혹은 좀 더 나아가 별 빛일 수도 있다. 회화적 표현에서 논리적 사고체계는 사실 매우 쓸모없는 기제일 수 있다. 밤하늘에 별 빛이 나뭇가지에 꽃처럼 걸려 있다고 본다면 별과 꽃은 화면을 넘어 이중적 세계로 나아가는 또 다른 객체가 된다.
3. 몽상, 그리고 ……
프랑스의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의 철학자, Gaston Louis Pierre Bachelard)는 그의 책 La poétique de la reverie(몽상의 시학)에서 몽상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몽상은 의식의 빛이 그 안에 존속하고 있는 정신 활동이다. 몽상이 현실, 시간, 장소 밖으로의 탈출이라는 인상을 주는 경우라 할지라도, 몽상가는 탈출하는 것이 자기 자신(육체로서의 자신)이고, 과거나 여행의 유령인 '영혼'이 되는 것도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G. Bachelard, La Poétique de la rêverie, Paris, PUF, 1960, 32쪽)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엄경근의 그림은 이를 테면 화가 엄경근의 몽상일 수 있다. 다만 바슐라르의 표현대로라면 엄경근은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이 그림을 그렸으며 약간의 현실과 시간과 장소를 벗어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의식이 지향하는 세계와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4. 고마움
이 그림을 나에게 준 엄경근 화백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