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지내고
1. 이동
거의 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들이 이동을 했다. “조상을 아주 잘 만난 사람들은 해외로 가고, 그다음은 국내 여행을 가고, 조상을 잘 못 만난 사람들이 제사를 모시러 고향으로 간다”는 우스개 소리가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말들이 유행하는 세상이 왠지 찜찜한 연휴였다.
그 호사가들의 표현 중, 거의 마지막 경우에 해당하는 나 역시 어찌어찌하여 이동을 해서 피붙이를 만나 연휴를 보냈다. 연휴 동안 글쓰기를 멈췄다.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연휴 기간 동안 파랗게 보이는 하늘과 피부에 닿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것 외에는 세상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다. 이를테면 해가 바뀌거나 흔히 말하는 명절에는 나는 늘 이런 생각에 빠지곤 한다. ‘도대체 이렇게 복잡한 세상과 관계들을 지배하는 거대하고 분명한 원칙은 존재하는 것일까?’ 한다면 그 원칙의 기준과 연원은 또 무엇인가? 하는 다소 쓸데없는 질문에 늘 골몰하게 된다.
2. 道
위대한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의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탈레스’의 제자로 알려진)는 자연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연은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법칙에 의해 지배되며 자연의 균형(interest in its origins)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The Grand Contraption: The World as Myth, Number, and Chance, David Park,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37쪽)
그가 생각했던 법칙은 앞서 말한 나의 소소한 법칙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는 자연과학적인 법칙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법칙이 기초가 되어 내가 생각하는 법칙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기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범위에서는 그가 말했다는 ‘아페이론(무한)’의 개념이 적용되지 못할 곳은 분명 없다.
우주의 핵심이 곧 나의 핵심이다. 우주의 법칙이 곧 내 삶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장자』 ‘지북유’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말한다. “도는 물을 수 없는 것이며,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다. 물을 수 없는 것인데 물으니, 이것은 물음이 다한(끝난) 것이다. 대답할 수 없는데 대답한다면, 이것은 도가 안에 없는 것이다.(도라고 말할 수 없다.) 안에 없는데 물음이 다한 것을 기다리니 이것은 밖으로는 우주를 보지 못하고, 안으로는 태초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핵심은, 도는 질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도가 곧 자연이며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이며 ‘아페이론’ 일 수 있다. 하여 도라 한다.
3. 우주의 시원에 道가 있다.(『장자』 ‘서무귀’)
도덕경 35장에서 노자께서는 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道라는 것은) 視之 不足見, 聽之 不足聞, 用之 不足旣(시지 부족견, 청지 부족문, 용지 부족기)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며, 써도 다함이 없네.(마지막의 不는 無의 의미에 가깝다.)
‘노자’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장자’의 후학들은 이것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여 『장자』’서무귀’에서 우주의 시원까지 논한다. 어쨌거나 특별하고 근원적인 원칙이 있다는 것에 시기를 막론하고 동서양은 비슷한 의견이다.
명절에 이동하는 문제가 나에게 이런 거대한 법칙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6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내가 보낸 그 많은 명절들은 단 한 번도 이런 원칙을 벗어난 적이 없다. 시절이 변하고 공간이 달라지면 느낌도 변하기 마련인데 이 시기의 이 느낌은 철들고 난 50년 이상(내 나이 10살 전후로 이런 느낌을 가졌다고 가정하면) 거의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자연의 법칙과 노장의 도가 한결같이 가리키는 방향은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인데…… 60을 넘긴 나는, 올해도 전혀 무엇인지도 모른 체 여전히 분주했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