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비가 오락가락하는 밤이다.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기온은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결단코 가을은 올 것이며 또 그렇게 세월은 흐를 것이다. 불투명하고 흐릿한 이 밤, 비창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 주인공 소냐의 아버지 알코올중독자 마르멜라도프는 스스로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이 가을 밤... 우리의 처지가 아닐까?
요즘 세상 일을 생각하자니 편안히 앉아 밥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또 글을 쓰는 이 순간이 괜스레 미안해진다.
Symphony No.6 in Bm, Op.74"Pathetique"
I. Adagio - Allegro non troppo(18'50")
음울한 서주부, “너무 지나치지 않게 non troppo” 의 악상기호를 가볍게 배신하고 서주부는 지나치게 음울하다. 아마 콘트라베이스이거나 어쩌면 첼로, 아무래도 좋다. 그러다가 서서히 반전을 시도하는 관악기들, 트럼펫을 선두로 일제히 일어서는 관악기들...... 하지만 어쩌랴! 그런 반등조차 기쁨이나 환희가 아닌 슬픔의 심연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그리고 연이어 심연으로 무너져 내려앉는 현악기들, 그 뒤를 따르는 저음의 관악기와 불안한 팀파니의 두드림.
두 명의 지휘자가 연주한 음악을 각 각 들었다.
‘카라얀’은 음울하고 단정하며 동시에 무겁다. 반면 ‘므라빈스키’의 음울은 무거움만 있지는 않다. 좀 더 복잡한 감정이 끼어들지만 뭐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러시아가 가지는 음울함은 어쩌면 엄혹한 날씨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비창은 러시아의 느낌이 반영되었다면, ‘카라얀’의 비창은 확실히 단정한 게르만 풍이다.
표트르 대제 이후의 타락한 제정 러시아의 귀족들에게 'TCHAIKOVSKY'의 음악은 위안이었고 또 내부적 안일의 외부적 표상이었을 터, 러시아 5인조가 지향하는 민중 음악의 표현보다는 훨씬 귀족적 취향이었으리라! 나른해지는 현악기에 맞추어 전체적인 악기들은 꿈꾸는 듯 늘어진다. 무엇이 'TCHAIKOVSKY'를 나른하고 늘어지며 또 내려앉게 했을까? 병약한 자신의 몸과 불행한 결혼 생활과 음악원 교수로서의 모범적 생활이 가져오는 내면과의 갈등이었을까?
어쩌면 이미 몰락해 가는 로마노프 왕조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무너진 농민들의 생활이 혹시 'TCHAIKOVSKY'의 눈에 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TCHAIKOVSKY'는 러시아 민중에 대한 애정은 많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TCHAIKOVSKY'는 음악은 언제나 귀족 지향적이었으며 음악의 내면 또한 러시아적이라고 하기에는 러시아 느낌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유럽의 정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음악은 초연 당시 관객으로부터 엄청난 야유를 받았다.
갑자기 섬광처럼 번쩍이는 음악! 메트로놈 추를 빠르게 왕복시키는 템포, 전쟁처럼 오래 남는 기억은 없으리라...... 아마도 전쟁의 기억인 듯 현악과 관악기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불안하고 기형적인 화성이 수직의 단계를 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음악은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다시 음악은 한 없이 나락으로 빠져든다. 너무나 조용하고 느리게 느리게 1악장이 마무리되면서 2악장으로 이어진다. 차이코프스키의 다른 음악, 이를테면 '백조의 호수'나 '1812년 대 서곡'에서 언젠가 들었던 변주가 반복되며 2악장이 시작된다.
II. Allegro con grazio (7'05")
2악장은 우아(grazio)하다, 비창이라는 표제와 어울리지 않게. 그리고 다른 악장보다 훨씬 짧다. 그래서 'TCHAIKOVSKY'는 오히려 2악장에 애착을 두었는지 화성의 편성이 간결하고 동시에 유려하다. 아마도 슬픔 가운데 오는 작은 행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악장에도 바람은 있다. 폭풍처럼 몰아치지는 않지만 산들바람은 훨씬 넘는다.
‘카라얀’은 2악장에서 때로 섬뜩한 광기를 부린다. 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 시대를 지나온 '카라얀'의 정신은 아마도 흔들리거나 혹은 광포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므라빈스키'는 결연하다. 레닌과 스탈린 시대를 거쳐오면서 굳어진 그의 음악적 여정은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지향점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III. Allegro molto vivace (8'46")
3악장으로 가면서부터 삶의 불안처럼 그리고 불안의 일상처럼 불협화음이 등장한다. 삶에 언제나 걸쳐져 있는 불협화음...... 불연속선, 문제와 문제 사이의 불투명 등이 아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연주되는 현악기에 의해 표현된다. 늘 현실에서 이것을 느끼는 나는, 음악에서 조차 불협화음은 곤혹스럽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끌림은 아마도 우리 삶의 본모습에 대한 수긍, 이를테면 어찌할 수 없이 모호한 것의 연속선을 지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것처럼. 늘 우리의 가슴속에는 하나 이상의 불협화음은 있지 않는가?
관악기와 현악기의 협주는 매끈하지 않고 여기저기 튀는 관악기와 현악기 소리들. 일관된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독주를 시도하는 관악기들과 현악기들 사이로 타악기들이 불연속선을 그으며 지나간다. 팀파니가 비등하듯 소리가 커지면서 호흡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돌연 음악은 엉뚱하게도 행진곡처럼, 혹은 팡파르처럼 크게 울려 퍼진다. 대형 심벌즈가 번쩍이고 소란스러워진다. 이어지는 고음의 관악기, 하지만 타악기들이 관악기를 둘러싸고 그 정점에서 심벌즈는 다시 울린다. 3악장 마지막으로 가면서 차이코프스키는 어쩌면 애초에 생각한 주제의식을 슬그머니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IV. Finale.Adagio lamentoso - Andante (9'55")
4악장은 슬픔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시대의 절망도 아니고 또 타인으로부터 절망도 아닌 삶의 불안이며 오히려 내부적 자만과 좌절의 굴절임을 'TCHAIKOVSKY'는 알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가여운 것lamentoso”로 표현하며 느리게 느리게 가라앉다가 마침내 격정적으로 회복하려 한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내부 문제였음을 알았다는 듯이.
그러나 이 부분에서 ‘카라얀’과 ‘므라빈스키’의 견해는 마침내 확연히 구분된다.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므라빈스키’의 견해는 내부였다면, 카라얀의 견해는 결단코 외부인 것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