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ociety of moderation(절제 사회)
A society of moderation(절제 사회)
아침에 학교에 오니 공용 탁자 위에 예쁘게 꽃꽂이된 꽃이 놓여 있다. 조금은 우울한 비 내리는 2월의 월요일 아침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곧,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화훼농가의 어려운 사정 이야기가 떠 올랐다.
왜 우리 화훼 농가는 어려움이 있을까? 졸업시즌에 꽃 한 다발이 이미 몇 만 원이 넘어가고 있는 상황인데 정작 화훼농가들은 꽃밭을 갈아엎고 있으니…… 이것은 유통 구조의 문제임에 틀림이 없는데 물류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는 농가들은 비싼 생산비에 생산을 하고 싼값에 시장에 내놓고 있으니……
얼마 전 세계 최대의 화훼국가인 네덜란드의 꽃 경매 시장을 T.V로 본 적이 있다. Aalsmeer Flower Auction(알스미어 꽃 경매 시장)은 하루 판매량이 약 2200만 송이로 전 세계 꽃 교역량의 80%를 차지한다. 45만 3천 평으로 축구장 250개를 넘는 크기로 서울에 있는 양재 꽃시장의 20배 규모에 육박하는 경매장으로 농업인들의 소득이 최대한 보장되도록 하고 있어 농업인 스스로가 소득을 지키려는 조직화에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농민이 지키는 시장과 꽃 가격은 소비자에게는 저렴하고, 농가에게는 충분한 가격 구조가 알스미어에서는 유지되는데, 그 배후에는 정부와 지자체의 제도적 보장과 일반 사람들의 꽃 농가에 대한 존중과 절제가 중요한 요소라는 리포터가 말했다.
그럼 왜? 우리는?이라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를 짚어 본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절제moderation를 잃어버렸다. 노자도덕경 46장은 만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내용을 좀 더 깊이 읽어보면 46장은 욕망慾望과 그 욕망의 심화로부터 초래하는 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화禍, 막대어부지족莫大於不知足 -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다.) 앞부분에서 천하에 道가 있을 때에는 어느 누구든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으려 한다. 그런 시절에는 말이 그저 농경農耕을 위해 사용될 뿐이다. 천하에 도가 사라지면 말은 전쟁을 위해서 기른다. 누군가를 죽이고 뭔가를 훔치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감정 emotions이 절제되지 않고, 모든 것을 욕망 desires이 지배하게 된다. 오로지 충족되지 않는 욕구 want만 있는 상황이 되고 만다.
타인이 성공하면 타인의 노력을 보지 않고 그 결과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곧 자신도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타인과 비슷한 일에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면 처음 성공을 거두었던 그 사람의 입지만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따라서 시도한 모든 사람이 모두 불리해진다. 타락한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결과만을 보게 만들고 그 상황을 부추긴다.
내가 살고 있는 진주시 금산면 인구는 20000명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편의점은 11곳이다. 평균 한 곳에서 담당하는 인구수가 2000명이라는 이야기인데 편의점 운영의 기본 인구수 3000명(월 매출 기준 최소인구수 – 한국 편의점 협회 자료, 2022 기준)을 상회하고 있다.
이런 예가 편의점뿐일까? 치킨집이 그렇고 동네 미용실, 빵집이 그렇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자리 문제다. 외국인이 장악한 육체노동 일자리와 경기 불안으로 취업자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돈이 되는 일로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경쟁이 치열해진다. 소비자 입장에서야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오로지 소비자로만 살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문제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거대한 철학이 이미 사라진 것이다. 절제와 조정, 그리고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사회인데 자본주의가 타락하면서 이런 가치들은 거의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정치도 크게 한 몫을 한다. 함량부족의 정치인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회에 살다 보니 사람들은 절제나 배려나 존중을 잊은 지 오래다.
그나저나 졸업시즌인데 졸업생을 둔 부모나 친지들은 얼마나 비싼 꽃 값을 지불할지……. 그리고 농민들은 또 얼마나 손해를 볼지…… 나의 쓸데없는 오지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