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사람들은 저마다 모든 면에서 경계를 가지고 있다. 경계는 ‘境界’로 쓰기도 하고 ‘經界’로 쓰기도 하는데 의미의 차이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境界’는 물리적인 범위의 문제에 집중하고, ‘經界’는 가치나 기준에 중점을 둔다. 불교에서는 ‘境界’를 ‘모든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할 수 있는 대상, 지각할 수 있는 일’ 즉 인식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도 있어서, 의미만으로는 두 '경계'에 대한 뚜렷한 구분은 어렵다.
하여 물리적인 경계로부터 가치의 경계까지 나의 경계를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범위에서 어떤 기준으로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가? 물리적인 범위만 놓고 본다면 60대 초로初老의 고등학교 교사로서 변방의 삶을 겨우 유지해 나가는 존재이지만, 가치나 기준의 문제로 본다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자만과 오만의 존재일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해도, 누구도 뚜렷하게 반박할 근거가 없다.
노자께서도 이런 느낌으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도덕경 4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 …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불출호, 지천하, 불규유, 견천도. … 불행이지 불견이명 불위이성." 규闚: 엿보거나 얼핏본다는 의미, 유牖: 창窓을 의미함. 갇혀 있을(자의든 타의든) 때 보이는 작은 창의 뜻이 있다.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세상을 알고 창 밖을 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 … 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분명하며, 행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나의 境(經)界를 넓히면 얼마까지 넓힐 수 있겠는가! 또 얼마나 넓혀질 수 있는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늘 한계는 있고, 그 한계를 느끼며 또 그 한계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노자의 말씀을 따라 작은 공간, 겨우 창 하나 있는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켜도 좋지 않을까? 거기에서도 충분히 천하를 느끼고 더불어 도를 볼 수 있다면, 차라리 넓혀야 한다는 강박으로 세상을 헤매는 것보다는 좋은 선택이 아닐까? 심지어 그 공간에 나 있는 작은 창 너머로도 세상을 보지 않는, 어쩌면 보지 않아도 도를 알 수 있다면 …… (굳이 내가) 다니지 않고, 굳이 알지 않아도, 그리고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일 것이다.
미친 자본의 세상에 살면서 따라갈 수 없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며 허덕이는 우리에게 때론 이런 유폐幽閉와 그로부터 오는 절대의 자유가 그리운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