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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pr 22. 2017

장자, 오르세를 걷다. 발문

책의 발문을 쓰다.

양귀비 꽃, 악마와 천사의 조합

2017년 4월 21일 오늘, 문득 생각해 보니 5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의 삶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중심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늘 변경을 떠 돌았고, 스스로 주변부를 지향하며 애써 태연한 척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중,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항상 동급생보다 나이가 어린것 때문에 학급에서 또 학교에서 중심으로부터 멀어졌고, 대학 시절에는 사상과 이념이 나를 주변부로 내몰았으며 이것은 그대로 나의 삶 전체로 이어진 듯싶다.


변경에서 성장한 나는, 한 때 중심부의 삶으로 진입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다시 변경으로 돌아왔고 잠시 중심부를 향했던 나의 욕망이 지금은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변경에서의 삶은 자칫 소홀해지기 쉽다. 스스로 가치부여를 하지 않는 순간 자신의 삶은 초라해지거나 혹은 가벼워지고 만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변경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기야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아무런 고민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아 모두 그렇게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홀해지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 보지만 늘 한계를 느낀다. 그러면 중심은 무엇이며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사실 중심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지극히 자기 위안적이며 종교적 이야기를 두고서라도 중심은 다분히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중심은 개인이 이루고자 했던 최고의 목표가 실현되었을 경우의 삶과 그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라고 가정해두자. 그렇게 가정하니 내 삶은 단 한 번도 최고의 목표를 이룬 적이 없거나 또는 이루려는 순간 돌아선 꼴이 되고 만다.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루고자 했던 최고의 목표란 지극히 세속적인 것으로서 신분, 혹은 지위의 상승과 그로부터 기대되는 여러 가지의 시혜일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목표를 이뤘다면 아마도 또 다른 중심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내 삶도 변경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변경이라는 의식을 스스로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스스로 변경에 있을 것이라는 이 생각은 본래 내 생각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먹기로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혼돈스러운 것의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연속선으로 이해되는)은 언제나 불투명의 연속이었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분명해지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Marcel Proust(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가 바삭한 과자 한 조각을 곁들인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시골집에서 할머니가 차에 적셔주곤 하던 마들렌 조각이 생각났다. 이 에피소드에 관한 프루스트의 최초의 언급은 이러하다. “차에 적신 과자의 맛은 죽은 시간들이 숨어 있는 은신처의 맛이다” 우리의 지성으로서는 도저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차와 비스킷에 대한 우리 몸 특정한 기관의 기억이 찾아낸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로 James Joyce(제임스 조이스)는 그의 책 Dubliners(더블린의 사람들)에서 이렇게 썼다. 기억 중에는 “사람들이 내면의 가장 어두운 곳에 숨겨두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거기에 머물면서 기다린다. 언젠가 어떤 우연한 말이 갑자기 그들을 불러내기를, 그리하여 대단히 다양한 환경 중 하나에 직면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조이스가 말하는 ‘우연한 환경’이란 프루스트의 바삭한 과자와 커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망각하기를 반복한다. 물론 많이 기억해낼수록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때로는 망각해야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기억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어렸을 적의 추억은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심지어 아이가 어른이 된 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이 추억(기억)은 희미하게 잊혀 프루스트의 마들렌이나 조이스의 ‘어두운 곳’ 속에서 고치처럼 숨어 있다가 ‘우연한 환경’으로 되살아 날 때, 아름다운 기억으로 어른이 될 당사자에게 영향을 준다. 모든 것이 너무나 또렷하다면 그것은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기억은 잊힘으로 과거가 된다.


과거를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현재가 뒤바뀔 수도 있다. 이처럼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옛날부터 다양한 양상을 띠며 진행되었다. 과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Henri Bergson(앙리 베르그송)이 있다. 베르그송은 그의 책 Matière et mémoire(물질과 기억)에서 인간은 과거를 통합하여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을 활용하여 현재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무용수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가 과거의 수많은 동작 경험들을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듯이, 사람도 과거의 경험들이 이루어 놓은 방대한 흐름을 현재의 행동이나 사고 속에 자유로이 편집할 수 있고, 그리하여 더욱 충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의견에 공감한다. 특히 과거 자체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각각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각자 과거를 이해하는 방향과 이해하려는 과거의 기억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각 과거가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경’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입장, 혹은 기억은 프루스트나, 조이스 그리고 베르그송에 의하면 모두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유래된 현재의 습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도대체 과거라는 시간은 현재의 시간과의 사이에 물리적(형이하학)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프루스트가 차에 적셔 준 마들렌을 떠 올리게 했던 바삭한 과자와 차는 과거와 현재의 물리적 시 공간을 넘어 프루스트에게 나타났고, 조이스는 이 기억이 언제나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파악한다. 베르그송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조직체로 인식하여 과거의 인식이 현재를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 도움은 다시 미래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의 좌표마다 형성되었을 미세한 결절 점(수학적으로 함수 관계에 있을 수도 있다.)들이 연결된 곡선을 과거 혹은 현재 미래라고 부르기로 가정한다면 ‘변경’에 대한 생각은 그 결절점(좌표)의 형성 원인인 Y축과 X축의 값일 텐데, 이 값은 위의 예처럼 프루스트의 마들렌이나 조이스가 말한 우연한 환경일 수도 있고 베르그송처럼 하나의 값으로 표현되는 수많은 조직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시간은 내 기억을 꿰는 꿰미인 셈인데, 역설적으로 이 시간의 단절을 통해 기억을 봉인하거나 혹은 그 기억의 원인 값을 무효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인데 기이하게도 아직도 존재하는 시간이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내 생각의 변화를 본다. 그 기억과 시간의 틈 사이에이 글들이 어지럽게 존재하고 있었다. 하여 그것들을 묶어 하나의 기억으로 다시 저장하려 한다.


2017년 4월 어느 날, 내 변경의 기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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