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Jul 23. 2024

난초 꽃 피우다.

난초 꽃 피우다. 


2023년 9월 1일, 진주고등학교 교무실에 한 때 교장이었던 나는, 다시 본래 자리 교사로 되돌아와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마주하겠지만 정년까지 좋은 선생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9월 4일쯤, 교장으로 재임하던 지역의 우체국장께서 난초 화분을 보내셨다. 심지어 영전이라는 리본까지 달았는데, 교장에서 교사로 돌아온 것이 영전인가?...... 약간 어이없는 가운데 난초 화분을 둘 공간도 애매했다. 교장이야 독립 공간이 보장되지만 교사는 공유 공간이라 난초 화분을 둘 곳이 적절하지 않아 책상 책꽂이 위에 두어야만 했다. 심지어 당시에는 주신 분의 마음을 헤아릴 여력도 없었던 터라 속으로 생각하기에 ‘먹을 것이나 주시던지……’라고 까지 생각했다.



2023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걱정이 생겼다. 교사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 기간이 제법 있으니 난초 화분을 돌 볼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난초 화분을 죽일 수도 없고, 또 이것을 집으로 가져가기도 좀 그렇고…… 하는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2024년 봄, 지난겨울 잘 보살펴 준 덕인지 새로운 촉이 여러 곳 올라왔다. 살아가는 것이 기쁨은 미량이고 대체로 슬픔이나 회한, 그리고 답답함인데 난초 작은 촉이 나에게 주는 기쁨은 참으로 컸다.



그리하여 7월이 되자 놀랍게도 꽃대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본래 학교에 배달되어 오는 난초 화분의 수명은 길어야 5개월인데 1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에 꽃대를 올리다니…… 물론 분 갈이도 해 주었고, 물도 기간을 잘 지켰고, 더러 비 내리는 날에는 하염없이 비를 맞게 하였지만 이렇게 꽃대를 올릴 줄은(그것도 두 대나) 꿈에도 몰랐다. 말 없는 난초지만 우리는 자주 이야기했고(주로 나의 마음을 토로했고) 난초는 그 이야기에 새 촉으로, 그리고 꽃대로 화답한 것이다.



불교에서 식물은 6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윤회를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여 인간이 섭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6도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연기에 지배당하지 않음이요, 동시에 인연이 없으니 죽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식물도 인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희미한 의심을 늘 지울 수 없다.



드디어 방학하기 이틀 전 꽃망울이 팽팽해졌다. 아마도 방학하고 2~3일 이내에 터질 것으로 추정되었다. 7월 19일 방학을 했고 오늘, 즉 7월 23일쯤에는 만개했으리라는 짐작으로, 아름다운 꽃을 만나러 카메라를 들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이렇게 몇 생을 돌고 돌아 마침내 여기서 나와 만났으니 이 어찌 귀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문득 요즘 골몰하고 있는 문제 위에 난초를 넣어 본다. '중학교 철학 4'의 주제인 실존의 문제……



이 꽃은 실제(實際, Truth)인가? 아니면 실재(實在, Reality)인가? 혹은 실체(實體, Substance)인가? 또 혹은 실존(實存, Existence)인가?


‘실제’는 사실의 경우나 형편 의미로 사용하고 ‘실재’는 실제로 존재함, 즉 ‘본질’, ‘존재’, ‘본체’, ‘내용’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실체’는 실제의 물체, 또는 외형에 대한 실상이며 ‘실존’은 실제로 존재하거나 또는 그런 존재다.


난초 꽃은 ‘실제’이며 ‘실재’이고 ‘실체’이며 ‘실존’이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하다. 내 책상 책꽂이 위에 있는 난초가 꽃을 ‘피운’ 것은 ‘실제’다. 그리고 그 꽃 ‘자체’는 ‘실재’다. 동시에 난초라는 이름과 그 이름으로부터 도출된 ‘난초 꽃’은 ‘실체’다. 그리고 화분에 심겨 있는 난초와 그 난초로부터 피어난 꽃, 그 전체가 ‘실존’이다.



방학 내내 학년실에서 홀로 향기를 뿜어내다가 마침내 말라갈 꽃대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지만 결국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니 안타까울 이유도 없다. 내가 교장에서 본래 자리 교사로 돌아왔으니 그저 그것뿐인 것처럼.    


끝으로 #허성우 국장님 고맙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