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휴지기
여름 방학이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글쓰기가 어려워졌다. 더위도 더위 지만 일상의 변화가 큰 원인이었다. 출근해서 일하다가 퇴근하고 저녁 시간에 글쓰기가 일상이었는데 방학을 하니 출근을 하지 않고 퇴근도 하지 않는다. 그 사이 여행을 길게 했고 개인적인 일로 또 며칠을 보냈더니 문득 개학이 되었다. 오늘은 방통고 수업이 있어 일요일임에도 출근을 했다. 오후에 3시간 수업이 기다리는 사이 잠시 글을 쓴다.
일상이 유지된다는 것의 함의는 매우 깊고 넓다. 일상이 유지되는 가장 큰 조건은 삶의 리듬이 깨질 가능성이 있는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변화는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이든 간에 당사자에게는 일상의 유지를 어렵게 한다. 부정적인 변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일상은 거의 흔들린다. 긍정적인 변화도 일상의 유지를 어렵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근거가 다소 희박하지만 일상을 단단하게 하는 에너지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일상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 (부정적인 것에서도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결국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진폭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삶은 불안해지고 불안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판단을 흔든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에서 비롯된 과정과 결과는 오류이거나 오류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우리의 내면은 유지하기 어렵다.
2. 내면과 외면
『장자』 달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전개지田開之(가상의 인물, 일반적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라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축신祝腎이라는 인물로부터 배움을 받은 인물이다. 당연히 축신은 도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전개지에게 주나라 위공(주나라 환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조竈)이 도를 묻는다. 그러자 전개지는 겸손하게 자신은 그저 축신의 시중만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재차 위공이 묻자 전개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善養生者 若牧羊然 視其後者而鞭之(선양생자 약목양연 시기후자이편지)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羊을 기르는 것과 같아서 ‘제대로 가는 놈은 놔두고 뒤처진 놈을 보고 채찍질을 한다.’고 했습니다.”
애매한 위공이 다시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전개지는 다시 두 명의 가공인물을 이야기한다. 한 명은 선표單豹라고 불리는 은자隱者와 또 한 명은 장의張毅라는 인맥이 넓은 인물이었는데, 선표는 내면을 든든히 했으나 어느 날 호랑이 밥이 되어 목숨을 잃었고, 장의는 외면을 잘 관리했으나 마흔에 그만 속병이 들어 죽었으니 둘 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에 대해 노력을 통해 채워야만 한다. 뭐 이런 이야기다. 선표는 내면의 양생과 함께 외면을, 장의는 외면과 함께 내면을 잘 양생 하였다면 삶을 잘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비록 외면과 내면의 조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왠지 ‘장자’의 무위에 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어진 듯 보인다. 상당히 엉뚱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러자 우리의 중니(당연히 우리가 아는 그 공자는 아니다.) 선생이 한 마디 하신다.
“안쪽만을 중시하여 은둔하지 말 것이며 밖으로만 나가 너무 지나치게 드러내지 말고 內와 外의 한가운데에 고목枯木처럼 서야 할 것이니 이 세 가지를 잘 얻으면 그 명예가 반드시 최고의 경지까지 갈 것이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일상과 욕망인데 이것을 경계할 줄 모른다면 내면의 수양을 잘못한 것이다.”
3. 내면이 엉망인 자들!
거의 평생을 중등 교육 현장에 있었던 내가 지금 이 땅의 내면이 엉망인 무도한 자들을 보면서 우리 교육이 시작부터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 교육은 사람의 도리와 근본, 그리고 마음의 모습을 배우기 전에 기술과 경영과 처세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명석한 머리를 가진 자들은 금방 그 기술을 배운다.
시험을 잘 치는 기술을 익힌 그들은 세상에 잘 적응하는 기술을 배운다. 세상에 잘 적응하는 기술이란 별 것이 아니다. 약한 자를 이용하거나 동시에 누르고, 강한 자에게는 복종하면서 동시에 강한 자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그것을 그들은 처세라 부르는데 문제는 그 처세의 기준은 인류적 양심과 도리, 그리고 인간 사회의 통념적인 선과 악을 자신들 기준으로 재단해 버리는 것이다. 엄청난 더위가 지속되는 이 땅에 내면이 엉망인 자들이 우리 위에 있으니 더 덥고 더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