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산책(59)
어리석은 욕망
날씨가 정말로 오래 덥다. 한 달이 넘게 열대야가 지속되는 것을 보면 이제 앞으로도 내내 이런 여름을 맞이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날씨가 더우니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느낌이다. 뭔가 풀어지는 이 느낌이 참 싫지만 제어할 방법도 딱히 없다. 그래서 더 문제다.
지난 7월 15일, '중학교 철학 3'을 출간하고 이제 한 달이 지났다. 앞의 책들(중학교 철학 2와 1)에게 시너지를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책 자체(내용이나 방향)의 문제인지 판매가 신통치 않다는 출판사의 전언이다. 나의 한계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섭섭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다. ‘섭섭하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대가 어그러져 마음이 서운하고 불만스럽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기대’다. ‘기대’는 ‘어떠한 일이 있기를 바라거나 어떠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예측을 하거나 어떠한 일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감정'을 말한다.
기대 속에는 늘 ‘예측’이 들어 있다. 예측은 ‘가능성’의 문제다. 가능성은 다시 ‘확률’이 기저에 있고 이런 유형의 문제에 있어 확률은 결국 ‘경험’에 의존한다. 즉 경험에 기초하여 느끼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라는 감정이 ‘섭섭함’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즉, 섭섭함은 과거 시점의 경험을 기초로 한다. 내가 섭섭한 것은 과거의 특정 시점에 현재와 유사한 일들이 있었을 때, 그 일에 대한 대응이나 처우가 현재와 비교하여 좋았고 현재는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 섭섭함의 담백한 본질이다.
중학교 철학 3을 펴 내고 한 달이 넘었는데 아주 가까운 지인 중에 몇은 아직도 내 책을 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오늘 들었다. 나와 인연이 희미한 사람들도 이미 사 본 책을 아직도 사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왈칵 섭섭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과거 특정 시점, 이를테면 중학교 철학 2나 중학교 철학 1이 나왔을 때는 지금과 달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때도 똑같았다. 그러면 나의 섭섭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섭섭함은 나에 대한 타인의 처우나 대응이 문제가 아닌 순전히 나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나를 내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이전의 없던 경험(중학교 철학 2나 1이 출판되었을 때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상황)까지 조작해 내서 내가 섭섭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를 내세운 다는 것은 이렇게 무섭다. 극단적인 이기심이 그 속에 있고 ‘자만’과 ‘자기애’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노자께서 이런 인간의 마음을 알고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비이기무사사? 고능성기사.)
‘나’를 주장함이 없기 때문인가?(즉 없으면) 고로 ‘나’를 이룰 수 있다.
도덕경 7장 마지막 부분
“나를 주장하지 않으면 나를 이룰 수 있다”에서 앞의 ‘나’와 뒤에 나오는 ‘나’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앞의 ‘나’는 상대적인 ‘나’이고 뒤의 ‘나’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나’다. 여기서 절대적인 ‘나’라는 말은 아트만(Atman), 즉 만물에 내재하는 영원 불멸하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의미하며,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이르는 브라만 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나’이다.(부처는 이 ‘나’를 부정했다. 그래서 부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주장한다.) 여기에는 어떤 집착이나 구별의식이 없다. 너에 대한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의 욕망이 섭섭함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나를 주장하고 나를 내세우고 나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야 말로 ‘나’를 잃는 길인데 어리석은 나는, 여전히 ‘나’를 내세우려고 안달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섭섭한 것이다. 깊이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