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산책(63)
마음의 範圍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 범위 안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문득 그 범위를 느낄 때가 있다. 타인에 의해서 혹은 스스로 알게 되든, 우리는 우리의 범위를 느끼는 순간 그 범위를 넘어설 것인가 또는 그 안에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생존하는 동안 늘 이 고민은 예상하지 못하는 국면에서 불쑥불쑥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범위의 문제는 매우 복잡한 경계를 가진다.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하는 범위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희미한 경계도 없는 오직 마음의 작용일 뿐이어서 그것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범위일 것이다.
범위를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느끼지 않을 때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 자유로움은 여러 면에서 매우 제한적이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그 제한적 자유로움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더러는 범위를 느껴도 애써 그 범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무시해 버리고 현재 유지되는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 문제는 늘 있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노자도덕경에서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다.
"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 …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불출호, 지천하, 불규유, 견천도. … 불행이지 불견이명 불위이성." 규闚: 엿보거나 얼핏 본다는 의미, 유牖: 창窓을 의미함. 갇혀 있을(자의든 타의든) 때 보이는 작은 창의 뜻이 있다.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세상을 알고 창 밖을 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 … 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분명하며, 행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도덕경』47장
위에서 말한 나의 어리석은 범위의 문제를 가볍게 박살 내는 노자의 말씀이다. 하지만 노자 말씀은 일상적인 범위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에게는 요원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범위를 인정하지만 범위를 넘어서는 것, 범위 안에 있지만 그 범위에 묶이지 않는 것,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살피지 않아도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 어떤 유위도 없으면서도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 감히 우리가 따를 수 없는 경지다.
도덕경 이야기를 하고 나니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힌 범위의 문제는 오히려 더 난감해지기만 한다. 가을밤이 몹시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