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피나코테크를 가다.

by 김준식


장자, 피나코테크를 가다.



“장자, 오르세를 걷다”를 2017년에 펴냈으나 내가 바라는 결과는 아니었다. 나의 책이 세상에 또 등장했다 정도의 효과……


퇴직을 앞두고 아니 퇴직을 맞이하면서 장자, 피나코테크에 가다를 소설 형식으로 써 볼까 하고 오늘 그 처음을 이렇게 시작했다.


나와 장자의 대화를 통해 피나코테크의 그림을 이해하는 …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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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여름 햇살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웠다. 도시 한가운데, 회색 석조 건물의 문 앞에 서니, 문득 뒤에서 낯익은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 양반이 서 있었다.



잘 기른 수염이지만 왠지 허름해 보이는 차림...... 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장자’였다.



“여기가 피나코테크란 곳이오?”


“네, 유럽 회화의 보고죠. 들어가시겠습니까?”


“무릇 도는 모든 곳에 있으니, 그림에도 있을지 모르지 않소.”



우리는 나란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쪽은 차가운 공기와 정숙한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첫 번째 전시실, 빛 한 줄기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비추고 있었다. 푸른 산맥과 운해, 그 위에 서 있는 한 인물. 장자가 한참 동안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실제 카스파 프리드리히 그림은 함부르크 미술관에 있다. 상황을 위해 그림을 가져와 본다.)



“저 사람, 멀리 있는 걸 바라보는군.”


“네, 독일 낭만주의 화가가 그린 ‘인간과 자연의 거리’입니다.”



“나도 그 옛날, 호수 위에서 물고기가 유유히 노니는 걸 보며 물었다네. ‘물고기는 즐겁다’고. 혜자가 ‘그대가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고 했지. 하지만 지금 저 사람은, 저 바다와 산의 즐거움을 알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림 속 인물의 뒷모습이, 마치 혜자와 장자가 번갈아 서 있는 것 같았다. 먼 곳을 보려는 시선과, 그 거리를 채우지 못하는 마음.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장자의 대화와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그림은 보이는 것을 그리지만, 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잇는다네. 오늘은 그 둘을 같이 찾아보세!”



두 번째 전시실은 전혀 다른 공기였다. 벽은 깊은 붉은색, 조명은 그림마다 따로 비추고 있었다.



장자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루벤스의 〈사자 사냥〉이 걸려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한 사자와 창을 든 사냥꾼들이 뒤엉킨 거대한 화면. (사자 사냥은 피나코테크에 있다.)



장자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보더니, 작게 웃었다.


“사자가 사냥꾼을 사냥하면 이야기가 바뀌겠군.”


“네?”


“옛날에 내가 말했지. ‘큰 새는 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가지만, 참새는 그저 모이를 줍는다.’ 세상은 늘 강자가 약자를, 큰 것이 작은 것을 제압하는 줄 알지만, 바람은 어느 날 방향을 바꾼다네. 사자도 언젠가 들판의 풀을 부러워할 때가 오지.”(소요유)


그 말이 끝나자, 나는 그림 속 사자의 눈빛이 다르게 보였다.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어쩌면 자신이 쫓기는 존재임을 아는 눈. 루벤스가 그린 건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힘과 생명의 불안정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이 그림 속에서 사냥꾼과 사자 중 누가 강자일 것 같소?”


“아마… 둘 다 아닐까요?”


“그렇지. 도를 아는 이는 사냥꾼이기도, 사자이기도 하네. 생사를 가르는 칼날 위에서 둘은 잠시 하나가 되지.”


장자는 그렇게 말하고, 손끝으로 공중에 작은 원을 그렸다. 그 원 속에 사자와 사냥꾼이 함께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