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성과 단순성의 미학
며칠 전 연규현 화백 ‘지리산 일기’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의 작품전을 본 것은 두 번째다. 지난 2023년 함양에서 열린 ‘옛날 옛날 내가 놀던 작은 동산엔’ 전 이후 2년 만에 진주에서 다시 그의 작품을 보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지리산,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 있다. 두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한 작품은 매우 복잡하고 한 작품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지만 거기 산이 있고 하늘이 있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
연규현 화백은 수묵화가다. 수묵은 그 연원이 매우 깊다. 『장자莊子』 외편 ‘전자방’에 그 최초의 기록이 있는 것처럼 수 천년 동안 (동양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심상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유력한 방법이었다. 연규현의 작품은 수묵의 전통적 분류인 북종의 착색산수(색이 있는 그림)의 기법을 가미한 남종의 전담법(먹의 농담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그림)을 원용한 것에 가깝다. 물론 연규현의 작품 앞에 서면 이런 분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오직 그의 손끝에서 창조된 선과 선, 면과 면이 있을 뿐이다.
이전 전시회가 화가가 거주하는 지리산 견불동 주변의 압도적인 산과 계곡, 그리고 하늘을 묘사한 부분이 많았다면 이번 전시회는 그 시선을 조금 낮춰 산은 산이지만 산과 대지와 나무들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의 시선이 그만큼 부드럽고 친근해졌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창공에 나는 매 한 마리가 경이로운 2021년 작 견불에서 느끼는 경이로움도 좋지만 지금 낮아진 시선의 화면도 너무나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처음 그림은 매우 복잡한 화면이다. 소나무 가지가 우리의 내면처럼 화면을 복잡하게 분할하고 있다. 동양 화론 중 외사조화外師造化(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배우고) 중득심원中得心源(안으로는 그 심원함을 터득함)을 화가의 경지로 풀어낸 화면이다. 먹과 물이 만나 이렇듯 사물의 외경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능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화면 속에 등산객의 모습을 보면서 작가와 작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다. 2023년 그의 작품 견불에서 받은 느낌을 나는 동기창의 책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요컨대 마힐(왕유)의 화격은 구름에 휘감긴 봉우리와 기암괴석에 천기마저 신비하게 감도는 듯하다. 붓은 자유자재로 거리낌 없으니 마치 조물주의 경계까지 도달한 듯하다.”
2025년 이 작품에서는 동기창의 이야기보다는 『장자』의 ‘좌망坐忘’에 가깝다. 『장자』 ‘대종사’에서 말하는 ‘좌망’이란 듣고 보이는 감각작용에서 떨어져 지각에 의한 작용을 줄이고 사물과 내가 상호작용하여 나와 사물이 비슷해지는 경지로, 지나친 인위적이고 차별적인 지식을 잊어버리는 상태를 뜻한다. 복잡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화면을 분할하지만 그것이 곧 자연이며 세계이며 대상이다. 거기에 등산객은 작가 자신이며 우리의 내면이며 또한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다가 두 번째 작품에 눈이 간다. 앞 그림에 비해 간결하고 담백하며 심지어 화면을 빈틈없이 지배하던 예전의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매우 성근, 그러나 알 수 없는 충만함이 작은 그림에 있다.
중국 오대 시대 후량의 화가로, 중국 회화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며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형호荊浩(850~911)는 그의 필법기筆法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즉 심수필운心隨筆運, 즉 마음에 따라 화필이 운용된다고 이야기하였다. 작가 스스로도 이 작품을 휘리릭 그렸다고 이야기하였는데 그 ‘휘리릭’이 오히려 작가의 경지를 대변한다. 간결함은 때로 복잡함을 지배한다.
분명 2023년의 작가와 2025년의 작가의 심상은 달라졌다. 간결한 필체와 성근 전담塡淡(먹의 농담을 이용하는 방법)은 이전의 작품에서 발견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는 마치 이전의 작가가 가졌던 사물에 대한 세밀하고 정교한 렌즈를 잠시 두고 조금은 흐려진 그러나 사물의 내면을 보는 시선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추정한다. 원망가진遠望可盡! 멀리서 보아야 다 알 수 있는 것처럼 때론 눈을 지그시 뜨고 사물을 보았을 때 오히려 사물은 본래의 뜻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작가의 변화는 작품의 변화로 이어지지만 이전의 작품과 지금의 작품 비교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작품의 변화를 세밀하게 읽고 그 변화를 논리화해 내는 것은 오로지 관람자의 몫이다. 지리산에서 한 세월을 보내고 계시는 작가의 삶이, 몇 점 그림으로 化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를 통해 수묵의 심원함을 알 수 있으니 작가를 알고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