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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an 28. 2019

송곳 같은 침묵

<티그리스에는 샤가 산다> (이호준 시집) 후기


-“티그리스엔 샤가 산다.”(이호준 시집) 후기-


1.     티그리스, 그리고 샤


2018년 10월에 산 시집 “티그리스엔 샤가 산다.”의 후기를 이제야 쓴다. 시집을 읽는 내내 목젖이 뜨거워져 몇 번이나 시집을 덮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법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뜨거움이 고마웠다. 왜냐하면 50대 후반을 보내고 있는 나의 삶이 아직은 여위어지지 않았다는 작은 징표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은 무작정 흐르기만 했다. 2019년도 1월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 후기를 쓴다. 참 더딘 후기다.


티그리스 강은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지르는 강이다. 터키 남부 타우루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샤트알아랍강에서 유프라테스와 만나 페르시아 만으로 흐르는 길이 1850km에 이르는 긴 강이다. 인류 문명이 시작한 강이었으므로 지나온 수 천년 동안 그 강변과 언저리에서 명멸한 인류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문명의 탄생과 몰락, 전쟁과 파괴, 혼돈과 질서를 함께 했을 저 오래된 강에 여전히 생명이 태어나고 동시에 사라져 가고 있을 것이다.


‘샤’는 시집 어디에도 설명이 없지만 그 강에 사는 물고기 정도로 파악된다. 하지만 페르시아어 샤(شآه‎ ;Shah)는 왕(王)이라는 뜻이다. 샤가 사는 티그리스! 완강한 은유다. 우리는 이 시집 제목을 보면서 티그리스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이미지의 대양에 ‘샤’라는 은유의 조각, 혹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풍경을 그려 볼 수 있다.


2.     작은 물고기 ‘샤’


티그리스강에는 작은 물고기 샤가 산다 그리고

먼 옛날, 대상들이 길을 부려놓던 *하산케이프에는

늙은 어부 알리 씨가 산다.

<중략>

때로는 그물 따라 마두금 닮은 낙타 울음이나

목에 걸린 방울 소리 딸랑딸랑 올라오고

때로는 하늘빛 같은 전설 한 자락

걸려 나오기도 하는데 그 도한 축복이 아닐 수 없어

무릎 꿇고 깊이 머리를 조아린다.

알라가 흙탕물 속에 샤를 감추는 날은


달빛 받아 배를 채우거나 별빛 걸러 목을 축이지만

그날 밤 기도는 더욱 웅숭깊다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 일부


* 하산케이프는 티그리스 강변의 위치한 도시 이름이다. 하산케이프 시는 찬란한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였다. 곧 수몰예정지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표제인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의 부분이다. /대상들이 길을 부려놓던/이라는 몇 개의 단어로만 티그리스강의 두텁고 아득한 세월의 지층으로 독자를 몰아가는 시인의 말솜씨에 놀란다. 대상들이 살던 시절 티그리스는 대상들의 삶의 터전이자 언제나 생명을 잉태한 강이었을 것이다. 그 오래된 강 옆으로 사람들은 길을 만들었고 거기서 태어나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 천년 부려놓은 길 위로 어부 알리 씨의 삶이 유지되고 마침내 그 길은 시인에게 와 닿았다.


3.     송곳 같은 침묵


아무리 생각해도 거룻배는 거룩배다

저 삿대의 송곳 같은 침묵을 보라

여러 목숨 지고 가는 이의 숨 막히는 손 짓은

(하략)  

<거룻배가 있는 풍경> 일부


시인의 눈으로 보는 사물, 동작, 태도, 느낌은 보통의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삿대’를 보면서 ‘삿대’ 이상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저 삿대의 송곳 같은 침묵을 보라/에서 삿대와 송곳, 그리고 침묵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은 내 살 한 움큼 내 피 한 모금 내

힘줄 한 가닥 내 영혼 한 자락 덜어줄 사람을 찾았다는 뜻

이다

(중략)

사랑은

단풍나무가 내주는 말간 젖이나

청보리 비릿한 향기를 싣고 온 봄바람처럼

달콤한 것만은 아니어서

(하략)

<사랑을 시작하는 그대에게> 일부


시인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뽑아 든 단어들을 보라! /단풍나무/ /말간 젖/ /청보리/ /봄바람/ 우리의 머릿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몇 개의 단어들로 우리의 감정을 온통 덮어버린다. 숨조차 쉬기 어렵다. 시인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훑어본 것처럼 그의 시를 우리의 마음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4.     은유의 힘


꽃 피는 날

전화해서 소풍 가자 할 사람 잃은 대신


꽃 지는 날

낮은 목소리로 부를 이름 하나 얻었다

<사랑이 떠나간 뒤> 전문


문득, 살아오면서 이렇다 할 이별이라고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마치 깊은 이별을 겪은 듯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꽃 지는 날이라고 뚜벅 이야기한 시인은 정작 꽃에 집중하지 않았다. 꽃 보다 백배나 더 깊은 ‘목소리’를 말한다. 이 절묘한 발상의 전환 탓에 나는, 시인의 그림자조차 따르기 어렵겠다고 생각이 든다.

 

‘낮은’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를 곱씹어보자. 낮은 곳으로 모든 것(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빨리)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무거운 것은 활발함이나 명랑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 슬프고 답답함은 무거움으로 치환되어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된다. 그 바닥 같은 느낌의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이, 시인은 떠나간 사랑을 부르는 목소리라는 것이다. 떠나간 사랑이라! 떠나갔다는 말에서 전해져 오는 것은 아직은 ‘남아 있는’ 그리고 어쩌면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어떤 존재의 상상이 우리를 조금 더 가슴 아프게 한다.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시인의 힘이다.


하늘에 금이 그어지지 않았다고

새들이 모든 공간을 욕망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하늘에 눈물을 묻고 내려오는 것이다.

<새들의 장례식> 일부.


아! 시인은 어떤 곳에서 무슨 방법으로 생각을 했길래 이런 기막힌 표현에 이르게 되었을까? 새들이 모든 공간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오직 인간만이 공간을 욕망하고, 그 욕망에 따라 금을 그으며, 그 금에 목숨을 걸뿐이다.


‘새’가 가진 자유의 이미지가 ‘금’(줄을 그어 생긴 흔적)에서 구속으로 유추되더니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어떤 의미도 남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산란하여 흩어진다. 이를테면 새로부터 구속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시인은 죽음이라는 사태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인은 완벽한 자유의 하늘을 다시 날아오르는 새의 심상으로 들어가 슬픔을 이기고(/눈물을 묻고 내려오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새를 보고 있는 것이다. /눈물을 묻고/에서 나는 나의 감정을 이입시키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삶의 슬픔을 시인은 새의 단단하고 자유로운 날개 짓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5.     친숙한 몇 개의 단어


오늘은

마당에 내리는 햇살

죄다 끌어다 덮어도

이른 봄 첫배 깬 병아리처럼

몸이 떨려요


어머니

<몸살> 전문


마지막 ‘어머니’라는 단어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세상에서 오직 자신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인 어머니. 살아오면서 불행과 고통과 어려움을 지나칠 때마다 항상 부르는 단어 ‘어머니!’. 몸살 끝에 시인이 부르는 어머니는 나, 그리고 우리가 모두의 어머니가 된다.


직업이 哭婢(곡비)다.

<중략>

대신 울어주는 보시는 얼마나 찬란한가

침묵을 천형으로 지고 온 나무도 목메는 날 있어

바람에 꺾이거나 기갈에 지친 아이들을 보며

도끼에 한 생애 넘겨주는 형제를 보며

어찌 강처럼 울고 싶지 않으랴

<하략>

<매미보살> 일부


곡비란 지금은 없지만 왕조시대에는 장례에서 필수적인 존재였다.哭聲(곡성)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을 한 이들은 왕실의 장례인 경우 宮人(궁인)이 이 일을 했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婢(비-여자 노예)를 시켰으나 여의치 않을 때는 민가의 여자를 돈을 주고 고용하기도 했다.


보살이란 불교 용어로써 菩提薩陀(보리살타)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어 보디 사뜨 바(Bodhisattva)를 음역 한 것으로 보디 Bodhi와 sattva 사뜨바 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보리와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의미하며, 살타와 사트바(sattva)는 有情(유정, 생명체)이란 뜻으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깨달음과 중생을 합친 개념이다. 즉 ‘깨달음을 얻은 생명체’, 혹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생명체’란 말이다.


이는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부처(깨달은 사람 또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보살은 위로는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上求菩提(상구보리),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下化衆生(하화중생) 역할을 하는 일종의 중간자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곡비인 매미가 바로 보살이라는 이야기다. 남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존재,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존재, 그 마음은 바로 보살의 마음이다. 나무가 가진 /침묵의 천형/을 위해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울어 댄다는 시인의 상상 탓에 글을 읽으면서 목이 멘다. 최소한 나는 나무에게 있는 침묵의 단단함에 한 번도 가슴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매미는 그 침묵에서 나무의 고통을 느끼고 감응하여 목 놓아 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보리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6.     마침내 그리움으로.


맨 처음 꽃은

간절한 그리움으로 핀다는

시인의 진술은 위증이었다

오늘 새벽

강 건넛마을 개 짖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가지

하얗게 질린 꽃 서너 송이

실토했다

<매화 피는 새벽> 전문


봄 꽃, 특히 매화가 피어나는 순간을 절묘한 비유로 표현했다. 하얗게 질린 매화꽃! 사실은 발그스레한 속살이 있지만 개 짖는 소리에 놀라 속살 대신에 하얗게 질려서 불쑥 펴 버리고 만 것이다. 매화꽃의 실토가 없었더라면 올해도 나는 여러 시인들이 ‘그리움’이라고 위증하는 것을 모른 체 또 봄을 맞이 했을 것이다.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이 봄 내내 요령부득인 ‘그리움’으로 머리가 복잡할 뻔했다. 시인에게 빚졌다.  


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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