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喪我

by 김준식



2019년이 사라지고 2020년이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실물로 주고받은 연하장과 새해 덕담들이 이제는 SNS를 타고 범람한다. 거의 공해 수준으로 넘쳐나는 많은 종류의 새해 덕담을 하루 종일 가만히 바라보니 행운과 건강이 주를 이룬다. 행운의 최저 값은 요행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다. 건강은 현대인의 화두다. 둘 다 표면적인 변화에 방점이 있다. 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다.


항상 오늘만 살고 있는 우리는 정작 내일에 한 번도 당도하지 못한 채 생을 마치고 만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은 항상 지금이고 항상 오늘이다. 시간은 거의 완벽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우리를 관통해 간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 낸 것이 달력과 시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시간의 경과를 경험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장치인 셈이다. 즉, 극미의 순간들이 모여 1초가 지나고 그것은 다시 시간이 되어 지나간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일주일이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고 마침내 일 년이 지나는 것을 경험으로 느낄 수 있도록 달력과 시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새해는 서로 축하 주어야 할 사태인가? 항상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미래의 특정 순간을 느끼게 하는 장치로서 새해는 확실히 가치 있는 사태임에는 분명하다. 일 년 내내 시간에 쫓기든 시간을 지배하든 같은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 일 년의 마지막에 도달하여 맞이하는 그 극적인 전환은 확실히 의미 있는 순간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시간의 변화를 감지하고자 애를 쓰는 동안 우리의 다른 감각은 안타깝게도 둔화되고 만다. 그 시간 속을 사는 화학적 집합체인 육신의 내부에 깃든 영혼의 변화에는 자연스럽게 무심해져 가고 만다. 이유는 자명하다. 현대 문명의 8~90%가 육신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명멸하기 때문에 정신 차리지 못하면 영혼의 변화를 살피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속도와 변화의 폭이 엄청난 현대를 살아가면서 영혼의 변화를 살펴보기에는 우리 모두는 역부족이다.


장자 제물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스승 南郭子綦(남곽자기)가 어느 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제자 顔成子游(안성자유)가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 스승님의 모습이 평소와는 매우 달라 보입니다.” 그랬더니 스승인 남곽자기가 제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 오! 제자여 너의 눈이 대단하구나! 어찌 그것을 보았느냐?” “나는 지금 나를 스스로 떠났는데!(吾喪我) 네 눈에 그것이 보였다니!” (喪은 장사 지냈다는 말인데 유명한 장자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심지어 “나를 내가 살해했다!”로 풀이하기도 한다.)


1년이 지나면 몸은 일 년만큼 늙는다.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영혼은 1년이 지나면 오히려 늙지 않고 밝아지거나 맑아질 수 있고 깊어지거나 두터워질 수도 있다. 어쩌면 유일하게 순행하는 시간을 거슬러는 것이 영혼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오상아(죽이든, 떠나든, 장사 지내든)의 단계는 너무나 오래 걸리고 힘들겠지만, 다시 새로운 1년을 시작하면서 그러한 단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 지금, 오늘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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