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주말 아침, 변화와 순응에 대하여 생각해보다.
5월 초순은 송화 가루의 계절이다. 노란색 꽃가루가 천지에 가득하다. 소나무들이 피워내는 이 가루의 목적은 사실 번식이 본질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의 세계에 존재하는 번식과 생존의 움직임은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인식을 넘어 우주의 생성과 유지, 즉 우주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2020년 벽두부터 지금까지 세계를 흔들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역시 그러한 번식과 그것에 따르는 질서를 기초로 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또 다른 생존의 방법과 방식을 고안하여 대처하고 있다. 이 역시 우주적 사건이다.
이러한 질서는 우주의 생성으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함께 할 것인데, 그 거대한 과정의 극소의 순간에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 질서의 지배를 받고 있을 뿐이다. 극소의 순간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확대하면 그 속에도 여전히 미세한 점처럼 인류가 존재할 것이고 그것을 다시 확대하면 우리의 삶이 정말 찰나처럼 존재할 것이다.(찰나는 75분의 1초라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보다 더 오래된 족속들이 분명하다. 그 오래된 족속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습을 자주 변화시킨다. 좀 더 빨리 그리고 많이 번식시키기 위해 수 억년 동안 끝없이 변화해왔을 것이며 인류의 위협을 인지한 바이러스들은 이 순간에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우리의 삶도 변화하고 또 변화될 것이다.
문제는 순응이다. 질서에 따르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응이다. 그런가 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부적응으로 표현된다. 불응은 의지가 개입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이 의지가 거대한 질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상황인지 혹은 아닌지는 논외로 하자.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 불응인지 혹은 순응인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미묘한 문제다. 거의 동전의 앞 뒷면처럼 순응과 불응이 경계에 있는 느낌이다. 한편, 부적응은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태도의 문제다. 사태에 대한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상황의 파악이 그 기초일 텐데, 이를테면 바이러스로 인한 여러 가지 제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적응과 부적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극히 단순하게 예를 들면, 일상의 삶이 바이러스에 의해 침해된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생긴 여러 제한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별 다른 저항 없이(혹은 타인을 위해) 수용하는 것을 적응으로 보고, 그 반대의 경우를 부적응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부적응과 적응의 바탕 위에 순응과 불응이 위치할 것 같은 다소 위계적인 생각도 든다.
비 내리는 5월 초순 토요일 아침. 적응과 부적응, 순응과 불응의 논리 위로 거대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주적 질서를 상상해보며 변화하는, 그리고 변화될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본다. 더불어 그것에 대한 나와, 우리의 의지와 태도 등도 생각해보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