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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용 Mar 20. 2022

일기 _ 황정은

잊을 만하면 책읽아웃을 듣는다. 황정은 작가의 목소리로 그의 생각을 종종 듣고 있다. 이번엔 그의 책도 읽어 보았다. 읽으면서 익숙한 그 목소리가 같이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재미있게 잘 읽었다. 좋았다. 




발췌


8

건강하시기를.

오랫동안 이 말을 마지막 인사로 써왔다.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 당신이 내내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도 당신의 건강,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가 각자 건강해서, 또 봅시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다시. 


17

혐오는 어디에나 있어. 내게도 있다. 나는 실은 많은 순간 내 이웃을 혐오하고 먹는 입을 혐오한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드러낼 권리가 내게는 없어. 그런 건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걸 한다. 어디에나 있다.

..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엔 혐오를 드러내는 잔인성이 특별히 잔인한 어느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 안에" 있다고 말하는 페이지가 있다. 그러므로 "외적 혹은 내적 법으로 적절히 막아내지 못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 약자를 찾아 난폭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19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음악 한곡을 여덟번 열번 반복해 듣는 것이 어떻게 삶을 구할 수 있기까지 하느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두 형사, 그레이스와 캐런은 한번도 만나지 못한 마리의 삶을 본인들의 일로 돕는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며, 픽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의료인들, 질병관리본부의 공무원들, 방역물품 제조 공장 직원들, 신중하게 움직인 확진자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각자의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n번방을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의 기자들과 최초 증언자, '프로젝트 리셋'의 활동가들, 타인의 애쓰는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지난 몇달 동안 그것을 생각했다. 미국의 빈곤과 인도의 빈곤과 싱가포르의 이주노동자를 향한 배제와 유럽과 호주의 아시안 혐오와 미국의 파렴치한 정치와 일본의 정치적 무능은 이런 식으로 국경을 넘어 내 일상과 연결되고 만다는 것도. 


35

사람은 언제고 죽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구조 때문에 당장 죽거나, 손상당한다. '그게' 가능한 구조라서. 펜데믹을 일년째 겪으면서 부쩍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펜데믹 상황에서)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펜데믹 상황에서) 어떤 형태의 가난을 겪고 있는지, (펜데믹 상황에서) 어떤 정책이 부재한 채로 그 부재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지. 사람들이 일년째 목격한 바와 같이, 팬데믹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재난이니까. 


47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을 사랑한 시간내내 앤은 내게 닮고 싶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었다. 가혹한 현실에 시달려 손상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며 현실 너머로 건너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상이 현실을 밀어내며 엉뚱하게 팽창하는 순간을 나는 좋아했고, 그가 어른들 앞에서 비교적 의젓하고 무력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 그 상상력에 있다고 믿으며 상상으로 빠져든 시간이 내게도 있었고 그 상상들 중에 무언가는 내게 도움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49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은 뒤로 '어린이'라는 입버릇과 생각버릇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린이를 어린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도 좋다. 아이와 어린이는 다른 존재인 것 같다. 말해보면 그렇다. 어린이가 있다, 하고 말하면 거기 있는 어린이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이고 그가 나와 조금 더 관련된 존재로 느껴진다. 이 차이는 뭘까. 어린 사람이었던 적이 나도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모든 이가 아이를 둔 부모일 수는 없지만 누구나 어린 사람이었던 적은 있기 때문일까.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 혹은 조카들이 자라는 과정을 보고 듣기 때문인지, 창작물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린이가 곤란을 겪거나 학대당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온라인 뉴스를 눌러보기가 두렵고, 드라마나 영화에 어린이가 등장하면 일단 긴장한다. 


54

이 구조로는 학대당하는 어린이를 보호할 수 없다. 어린이가 가해 양육인들로부터 분리되어도 임시이고 잠시일뿐이다. 자식을 부모와 분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한 가부장적 가정질서 안에서 '아이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가해 양육인은 어떻게든 빼앗긴 것을 돌려받으려고 어린이를 찾아온다. 그 몸을 돌려받으려고.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학대가 의심된다는 신고가 이어져도 우리의 구조는 어린이를 몇번이고 '그래도 부모이고 가족'인 양육인들에게 돌려보낸다.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이 말은 그래서 아무런 입장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의견도 생각도 마음도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입장이고 의견이고 생각이고 마음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부모이고 가족'이라는 말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닐 뿐 아니라 누군가를 죽음으로 등 떠밀 수 있는, 상투적이라서 해로운 말이다. 나는 뒤늦게 발견되곤 하는 가정폭력 사망의 첫번째 원인으로 어른들의 그런 상투성을 꼽는다. 자기가 가진 것만을 헤아리는 그 게으른 태도들 때문에, 어린이가 고통 속으로 돌아가고 거기 방치된다. 


61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막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는 가족을 목격한 적이 있다. 늦은 밤이었는데 어머니는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어린 남매는 책가방을 등에 멘 채 겁에 질려 있었다. 정류장에 모여 있던 어른들이 나서서 보호자의 어린이들을 분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오빠가 격양된 상태라서 둘을 나란히 앉히면 안 될 것 같아 동생을 따로 앉혔다. 동생은 차분했다. 이런 상황을 한두번 겪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목이 마르다고 하는 그에게 물을 사다 먹이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경찰을 기다렸다. 물병을 꼭 쥔 채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내게 물었다. 

부끄러워서 나는 내 대답을 여기 적을 수 없다. 


65

파도를 기다려

모두 모여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으니 단체사진을 찍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른들 중에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모두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보았다. 파도가 올 때까지 기다려.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는 어른들 틈에서 나도 바다를 보면서 파도, 그것을 사람과 닮았지만 사람은 아닌 생물로 상상했다. 그가 곧 저 뒤에서, 탁한 물과 거품 속에서 일어나 걸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울어서 소리를 내면 그가 곧장 내게 다가와 달라붙을 것 같아 울지도 못하고 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세계가 열린 것처럼 소리와 색과 감정이 분명해졌으므로 나는 그 순간을 내가 시작된 순간으로 여기고 있다. 거기서 시작되었다. 파도를 기다려, 라는 말로. 

파도,라는 생물에 향한 공포와 혐오로 


69

공포와 혐오는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중에 혐오는 특히 그래서, 그건 지금 내게도 쉽다. 그런 감정이 내게 문득 쉬울 때, 뭔가가 누군가가 즉시 싫고 밉고 무서울 때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로 상상된 것인지, 혐오는 아닌지를 생각한다. 


74

타인의 삶과 죽음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는 일에 나는 반대하고 있지만, 어떤 삶과 죽음은 분명 신호이자 메시지이고 그것을 신호이며 메시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삶은 늘 있다. 이때 발신자는 살거나 죽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속한 사회다. 오늘 발견된 죽음 근처에서 고립되어 취약한 상태에 있을 사람들이 이 밤과 낮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91

나는 화면으로 책을 보지 않는다. 태블릿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글자를 보는 일은 내게 책을 읽는 일이라기보다는 눈을 태우는 일에 가깝다. 빛을 반사하고 흡수한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고 빛 자체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아무래도 꺼림직하다. 터치스크린으로 보는 글자들은 종이책으로 읽는 글자들보다 눈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집중해서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난 뒤에는 시신경을 무언가로 꼭 졸라맨 것처럼 눈 속이 뜨겁고 뻑뻑해 잠을 설치곤 한다. 


94

나는 지금 화면을 바라보며 문장을 적고 있고 이 작업의 결과가 웹 게시라는 걸 알지만 최종 결과가 종이책이라는 것도 안다. 원고 작업을 할 때마다 종이책을 받아들 때를 그 작업이 끝난 순간으로 여기고 있다. 종이책을 집에 들이고 종이책이라는 결과물을 향한 작업을 하며 종이책을 읽는 동안 연필을 소비한다는 것은 곧 지구 어디가에서 나무를 베고 썰고 분쇄해 끝장을 내고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도 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인간으로서 내가 유해하다. 그래도 그래도.

종이책을 읽는 사람도 부쩍 줄어든 시기에 책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종이책을 즐기고 싶다. 


128

한국계 미국인과 일본계 미국인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해 공격했다는 백인 남성의 범죄 소식을 인터넷 기사로 보았다. 그 기사에 중국인도 아닌데 왜 공격하느냐는 댓글을 적은 한국인을 보고 저런 걸 쓸 수 있구나 생각하느라고 아침 시간을 보냈다. 차별받았다는 생각으로 분노할 줄은 알지만 차별한다는 자각은 없는 삶들. 

사람 하는 일을 능력과 무능력으로 나눠 말하는 일을 가급적 피하고 싶지만 이런 '없음'엔 무능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다. 우린 종종 무능력해. 이 무능력의 원인은 무지일까, 기어코 모르겠다는 의지일까?

..

나는 내가 아주 강력한 동질 사회에서 나고 자랐다는 걸 알았다. 한국인, 가족, 이웃, 여성, 실은 동질하지도 않은데 동질하다는 강한 암시와 압박이 있고 그 속에서는 동질성 자체는 물론이고 이질성이나 다양성을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133

세월호 침몰은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끝난 사건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도와 안산에서 전국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사건이므로 나는 산보하는 길에, 산보하는 길에도, 그 기억들을 우리가 다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을 생각하고 다음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142

문학의 존멸은 내 싸움이 아니다. 내가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뭔가를 썼는지, 쓸 수 있었는지가 나는 궁금할 뿐이다. 소설을 쓰며 살다보면 문학이란, 하고 묻는 질문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이미 있는데 하필 왜 있느냐고 물어 멈추게 만드는 질문을. 누가 내게 그렇게 물으면 나는 일단 그를 의심한다. 개수작 마, 하고 실은 생각한다. 그 질문을 생각하느라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읽거나 쓸 수도 없어 사는 걸 그냥 중단하고 싶은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내게 묻지 않는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렇게 묻는 이를 만나면 너는 실은 내 원고나 내 싸움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너의 싸움에서 네가 스스로 찾지 못한 대답을 내게서 가져가려는 것뿐이다, 하고 생각하며 그를 잘 봐둔다. 


155

오늘 내가 가지고 다닌 책엔 그런 문장이 있었다. 발작 상태는 세상의 본성, 세방울의 피, 세마디 붉은 말. 세상에 관해 선명하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세상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문장들을 어제와 오늘 천천히 읽었다. 여기까지 쓰면서 문장,이라는 말을 몇번 생각했은지를 생각했다. 나는 이제 문장이라는 말이 싫다. 문장,이라는 말을 하거나 읽거나 생각할 때마다 그걸 멍하게 잡치는 기분이 든다. 문장을 써. 문장,이라고 쓰지 말고 문장을 써.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160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164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간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차마 용서를 청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가는 일이기도 한데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게 괜찮다. 


197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다시는 쓰지 않을 글과 몇번이고

고쳐 쓸 글 속에

하지 못하는 말을 숨기거나 하면서 그래도

여기 실린 글을 쓰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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