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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용 Jun 15. 2023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_ 권준호

책 리뷰

이 책은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을 운영하는 권준호가 쓴 책이다. SNS를 통해 일상의실천의 작업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일견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그들의 작업은 매번 볼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은유와 상징, 수작업에 기반한 결과물들은 나에게도 생소할 때가 많은데, 그런 것보다 더 놀라운 점은 그들이 디자인 스튜디오란 사실이다. 유형의 재화를 받고 디자인이란 서비스를 제공하는, 클라이언트가 존재하는 관계 속에서 그런 결과물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일은 생각만 해도 어렵게 느껴진다. 책에는 그런 고민이 듬뿍 담긴,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는 장문의 메일도 담겨있다. 그 외에도 디자이너로서의 여러 생각들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디자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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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07

구체화되지 않은 정보의 구조를 분석하고 엮어내어 시각적인 형태를 만들어가는 디자인 과정은, 머릿속에 부유하는 얼마간의 생각들과 삶 속에서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한다. 그러므로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습득해야만 하는 삶의 여러 원재료 중, 단편적인 소비성 정보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내가 읽거나 겪어낸 사람과 사물, 그리고 체험한 현상들을 이미지라는 보호막 없이 민낯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글쓰기의 숙련도가 부족한 만큼 나의 생각과 경험은 억지로 꾸며지거나 각색되지 않고, 좀 더 솔직하고 온전한 생각의 덩어리로 만들어지곤 한다. 생각과 경험을 글로 남기자는 결심은, 소비성 정보가 아닌 더 많은 글을 읽고, 온라인이 아닌 현실의 삶에서 더 다양하고 깊은 경험의 순간을 흘려보내지 말라는, 내가 나에게 내주는 일종의 과제이기도 하다.


12

우리는 무턱대고 견적을 물어보는 클라이언트에게 '가용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어본다. 단체와 개인, 기업과 비영리 기관 등 클라이언트의 상황에 따라 디자인에 지출하는 예산은 천차만별이지만, 우리가 가용 예산을 물어보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디자인에 그들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그들의 가용 예산을 공개하지 않고, 견적서를 받아본 후 예산이 배정될 것이라는 자동 응답기 같은 회신을 보내온다.


14

동일한 분량과 강도의 작업이라도, 그 작업의 비용은 상대적으로 다르게 책정될 수 있다. 우리가 '같은 분량의 일'에 다른 보수를 받는 이유는, 디자이너에게 '보수'의 개념이 돈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환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계산 안에는 하나의 작업이 갖는 사회적 의미, 작업자로서 느끼는 창작의 재미, 그리고 무엇보다 그 프로젝트를 의뢰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직업 자체와 작업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변수가 포함된다.

이 모든 변수를 고려해 적절한 디자인 비용을 정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애정과 디자이너의 노동에 대한 존중이 수반된다면, 예산을 정하는 일은 자신의 패를 숨긴 채 상대를 떠보는 눈치 싸움이 아닌, 서로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고 조율해 나가는 투명하고 건강한 협상이 될 수도 있다. 갑과 을, 클라이언트와 용역 업체가 아닌, 디자인이라는 노동이 갖는 특수한 상대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가는 협업자를 좀 더 자주 만나기를 언제나 고대하고 있다.


17

어떤 큐레이터도 일생동안 돌과 철재를 소재로 단정한 조각 작품을 선보이던 작가에게, 화려한 색채의 유화 작품을 의뢰하진 않는다. 물론 하나의 작품 세계를 깊게 파고드는 작가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민첩하게 풀어내야 하는 디자이너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이성과 직관의 균형잡기를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동반되는 창작의 행위 자체는 예술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한 디자이너가 쌓아온 문제 해결의 과정과 결과를 살펴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프로젝트의 실무자라면 기계적인 가격 비교가 아닌,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해당 프로젝트에 적합한 작업자가 누구인지 파악하려는 분석적인 노력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의뢰하려는 과업과 디자이너의 적합성을 연결 짓지 못한 채, 단지 가격 비교를 통해 디자이너를 결정하는 것은 좋은 작업을 위해 실무자가 담당해야 할 업무를 방기하는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프로젝트는 결국 좌표를 잃어버린채 목적지인 바다가 아닌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33

누군가 꾸준한 태도를 유지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꾸준함은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치열함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쉽게 판단하는 '원래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복제를 피하려 스스로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으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악착같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을 것이다.


37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개인의 타고난 표현 능력을 기반으로 발전하는 재능이라면, 디자인은 주어진 문제를 분석해 논리적인 해결 방식을 시각적으로 제안하는 행위라는 것을, 미술이 개인의 재능에 큰 영향을 받는 반면, 디자인은 후천적으로 학습하는 사회적 맥락과 관계성의 이해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속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맥락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개인의 능력을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 공동체와의 협업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평범한 청년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그제야 꿈이라는 것의 얼개를 조금씩 그려갈 수 있었다.


52

그들이 말하는 '대중적인 디자인'이란 '대중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어떤 해석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게으른 디자인일 수 있다. 반면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다양한 형식으로 시각화해 프로젝트의 주제를 은유와 상징으로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는 디자인은, 대중이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품고, 그들에게 디자인을 매개로 한 진지한 대화를 건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55

성공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대표님과, 그 대표님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작업을 제안하는 디자이너 사이에 있는 '실무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인 실무자가 대표님의 의견을 아무 여과없이 단순 전달하는 역할에 그친다면, 그 실무자는 프로젝트의 수월한 진행을 위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 '대표님 지시 사항'이라는 경직된 텍스트의 나열보다는 차라리 육성으로 직접 전해 듣는 편이 그 요구의 본질을 파악하기 그나마 수월하기 때문이다.


65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사진이 찍히는 대상이 필요한데,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작업의 차별성을 그 대상을 손으로 만들어내는 행위에서 찾았다.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 때 발생하는 계획과 우연 사이의 (오차 범위 내의) 불협화음이, 컴퓨터 그래픽 작업과는 다른 독창성을 작업에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67

디자이너는 사진이라는 단편적인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드러낼 것이며, 무엇을 감출 것인가를 판단하고, 그 드러냄과 감춤 사이에서 사진이 전달해야만 하는 이야기의 운율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보여줌으로써 전달되는 것과, 가림으로써 연상되는 것 사이의 긴장감을, 디자이너는 지면 위의 다른 요소와의 조형성과 맥락을 고려하며 배치해야 한다. 사진이 어떻게 잘리고 붙여지는가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 그 의도적인 왜곡이 따론 악의적인 욕망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을, 사진을 작업의 도구로 다루는 디자이너라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122

제대 후 돌아간 대학에서 수작업은 예술가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나는 절망했다. 수업에서 손으로 만드는 작업과, 질감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은 구시대의 것으로 여겨졌고, 학생들은 과제를 위해 컴퓨터에만 매달렸다. 디자인은 이성적인 계산으로 재단되어 있었고 그 냉장한 영역에 '감정적인 어떤 것'이 끼어들어 갈 틈은 없어보였다. 팔리지 않는 것은 디자인이 아니라는 믿음과 소비자와의 소통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소비자 욕구 조사는 학생들을 창작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 아닌 판매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교의 기본 정신이 되어버린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나는 항상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디자인이 반드시 대량으로 생산되어야 하는 걸까? 손으로 만들어진, 작은 집단 혹은 개인을 위한 이미지와 작업들이 디자인이 아니라는 그 신념과도 같은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125

한편 수작업에 기반한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와의 신뢰가 없다면 성사되기 어렵다. ctrl+Z 를 눌러 쉽게 뒤로 돌아갈 수 있는 컴퓨터 작업과는 달리, 한 번 재료의 성질을 변형해 만든 작업은 그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작업을 존중하고,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는 시도를 하는 디자이너를 믿어주는 클라이언트는 좋은 작업을 위한 가장 큰 조력자이며, 그 결과는 특히 손으로 만들어진 작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128

어떤 사람들은 사회의 변화를 꿈꾸고 나름의 실천을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의 허물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활동이나 생각이 어떤 이들에게 잠재된 부채 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일 텐데, 환경보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사람에게 어째서 완전한 비건이 아니냐고 따져 묻거나,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에게 노동자를 착취하는 글로벌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모순은 아닌지 질문하는 식이다. 이런 질문들은 일견 합리적 의심인 듯 포장되어 있지만, 그 속엔 '당신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속물이며, 혼자 고귀한 척하지 말라'는 본심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131

디자이너 역시 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일을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있다고 해서, 수많은 신념과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것이 어떠한 모순도 없는 순결한 가치일 수도 없다. 다만 이 작업이, 혹은 이 작업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가 내가 믿고 있는 삶의 가치와 위배되지는 않는지, 이 작업의 결과물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업에 뚜렷한 책임감을 가지려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143

디자이너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버려지는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좀 더 세심하게 일상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시선을 가질 것을 그는 tat*를 통해 제안하고 있는 것 같다.


149

'타이포그래피'는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를 다른 창작자들과 구분 짓는 가장 분명한 영역입니다. 디자이너에게 잘 짜인 조판은 하나의 훌륭한 예술 작품처럼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또한 '대화'는 디자인 작업을 진행할 때 동반되는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입니다. 클라이언트, 동료 디자이너, 인쇄소, 혹은 시공사와의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가는가에 따라 그 작업의 완성도와 마감의 질이 결정됩니다. 좋은 디자이너는 어쩌면 훌륭한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확장성' 역시 디자인 작업이 가진 중요한 성질입니다. 현시점의 디자인은 하나의 고정된 매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쇄물을 염두에 둔 디자인이라고 해도, 그 디자인이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운용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내기도 합니다. 전시의 주제, '포스트 미디어, 미래의 감각 체계'라는 키워드 역시 이러한 확장성이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57

클라이언트와의 효율적인 소통을 통해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를 원하는 디자이너라면, 분명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클라이언트의 행동 양식을 교정해 줄 의무가 있다. 아래의 내용은 실무 디자인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갑질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는 클라이언트의 행동 양식에 대한 현실적 대응의 참고 사례다.


158

카카오톡 방을 만들어 업무 요청 및 수정 사항을 생각날 때마다 전달할 때

디자인 작업은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과업이다. 카카오톡을 업무 용도로 사용했을 때, 사적인 대화 사이에 쌓여 있는 수정 사항을 미쳐 확인하지 못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수정 사항은 내부적으로 정리 후 공식적인 메일로 발송할 것을 요청해야 한다.


163

직접 디자인을 수정해서 보내줄 때

실무를 맡아서 진행하는 클라이언트 중 때때로 의욕이 넘쳐서 디자인 시안을 포토샵으로 열어 직접 수정 후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작업의 구성과 조형에 분명한 의미와 논리를 담아 만들어낸 창작물이며, 그 창작물을 작업자의 동의 없이 수정한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매우 무례한 행위로 인식될 수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특히 포토샵을 사용할 줄 아는 것과 디자인을 하는 것은 매우 다른 범주의 행위임을 숙지시켜야 한다. (이런 행위를 이미 저질러버렸다면, 디자이너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일 것이므로, 다른 디자이너를 찾아보는 편이 낫다.)


163

아무런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수정 사항을 전달 할 때

디자인 수정의 명확한 근거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 스스로 디자인 제안 단계에서 작업에 대한 분명한 논리와 근거를 클라이언트에게 제시해야 한다. 작업에 대한 서사를 겹겹이 쌓아올려 만들어진 디자인 제안서는 근거 없는 수정 사항을 반려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지만, 충분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무논리로 무장한 채 수정을 요청하는 클라이언트에게는 디자인이 개인적인 취향의 집합이 아님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168

한 사회의 고정관념을 전복하려는 그들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급진성과는 달리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는 신기할 정도로 보수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관습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어떻게든 관습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모순적인 태도는, 사람들이 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를 알 수 있는 역설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될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급진적인 사고였고, 우리에게는 평범한 디자인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인 변화였다.

그 간극이 너무나 멀어 보여서 아득하게만 느껴졌는데, 한편으로는 그 거리를 좁혀가는 것 역시 디자인의 중요한 과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깨우친 가치, 삶의 태도가 너무나 지당한 나머지, 그것이 지닌 의미가 아직은 낯선 사람들을 배척하고 폄하하는 일은 어떤 사상에 경도된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일반화이며, 때문에 시각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폭이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2

나는 창작이 노동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는다. 취미로서의 창작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창작은 더욱 그렇다. 노동의 완성도는 시간에 비례한다. 그래서 노동의 결과는 정직하고, 그 정직함이 창작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짧은 기간에 성급한 결과로 얻어진 결과물은 누군가의 생각을 베낀 것이거나, 어쩌다 우연으로 얻은 것이거나, 흉내 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의 과정을 생략한 채 매끈한 결과를 얻으려는 것은 창작 활동을 성과주의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계산적인 태도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아마도 또 하나의 영혼 없는 공산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5

'스튜디오'와 '에이전시'라고 불리는 디자인 회사의 차이점은 단순히 두 집단의 규모로 구분된다기보다, 해당 집단의 구성원이 추구하는 지향점에서 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스튜디오는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공동체이며, 그때 제시되는 '할 수 없는 이유'가 스튜디오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프로'라는 단어가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에 비추어본다면 그런 태도는 '아마추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8

'프로'라는 수식어가 디자이너에게 붙기 위해서는, 좋은 작업을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황이 아닌, 열악한 환경에서 진행되는 작업에서 설득과 균형의 언어를 통해 조형성을 잃지 않는 작업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그 이유가 눈앞에 펼쳐질 프로젝트의 고생스러운 과정 때문만은 아니어야 한다고 믿었다.


220

그 경험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디자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해야 한다고 믿던 그때의 나에게 작업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어떤 콘텐츠는 디자인이 개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언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더 정확한 소통을 위한 디자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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