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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용 Nov 27. 2023

작업자의 사전 _ 구구, 서해인

콘텐츠로그 뉴스레터를 통해 판매 소식을 알았으나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인구밀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구매를 포기했던 책. 그 후 TINN(@team.tinn) 계정을 팔로우하다가 마침 온라인 주문이 오픈되어 바로 구매했다. 스스로를 작업자라고 소개하는 두 저자는 여러 작업의 말들을 새로이 정의한다. (마감, 협업, 레퍼런스, 생산성 등등) 이미 사전적 정의를 가진 단어들이 있음에도 이런 사전을 만든 이유는 실재하는 공적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를 방지하고, 나아가 '일하는 나'를 더 잘 알기 위해서라고 한다. (뉴스레터 소개글 요약)

이 사전의 재미는 각 말들의 새로운 정의도 있겠지만, '정의하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작업자라는 포괄적인 범위에 속해있기 때문에 내 언어 역시 다른 작업자와 다를 수 있는데, 두 저자는 하나의 단어를 같이 정의하며 그 차이를 보여주고, 나 역시 그런 언어를 발견하고 정의하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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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8

"마감이 있다"는 말은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왜 누군가에겐 감정을 추동하는 말이 되는걸까? 질문을 던지다보니, '마감이 있는 사람'은 곧 '수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더라고요. 이렇게 우리가 관성적으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시장에서 나의 가치를 드러내는 말이 되기도 하고, 사회 규범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점이 흥미로워서 '작업자'의 말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아요.

9

저마다의 '일'의 형태가 다른데도 일을 늘 같은 단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어요. 우리는 왜 다른 작업에 대해서 같은 단어로 설명할까? 내가 작업에 관련한 어떤 단어를 이야기할 때, 상대방도 내가 의도한 의미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까? 

12

일에 있어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일을 할 수 있음(없음)'을 가늠하기 위해서 인 것 같아요. '할 수 있음(없음)'을 가늠하는 일이 곧 작업물의 퀄리티나 삶의 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38

메일을 잘 쓰는 게 사회가 요구하는 일잘러의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에 작업자들은 거절 메일조차 정중하고 능력 있게 보이도록 쓴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이는 분명 가성비의 관점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일인데, 누구 하나 메일을 쓰는 행위 자체에 비용을 책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43

회의 참가자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이야기를 공유했다는 믿음은 실제로 작업을 실행할 때 보란 듯이 부서지곤 하므로, 미팅에서 논의된 사항은 사소한 것이라도 문서의 형태로 남기는 편이 좋다. 

52

현대인이 SNS로 인해 집중력을 잃었다고 이야기하는 자들은 SNS를 생계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 자본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SNS가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인맥을 형성할 수 있고, 갖은 의뢰와 제안 속에 파묻힐 수 있다. 

54

완성도와 관련한 좋은 핑계거리. 작업자는 '초안'이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해당 작업물이 현 단계에서 완성되지 않은 작업이라고 정당화하며 이를 통해 안도감을 얻는다. 초안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다른데, 일반적으로 초안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원고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클라이언트는 초안을 토대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이때 작업자는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사실 초안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의) 최대치였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56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예술 작품 또는 상품들은 권력, 돈, 명예를 가진 자들이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향유한다는 점에서 그들에 의해 구체화된 층위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57

개인과 집단이 공유하는 모수 자체가 줄어들다 보니, 타인의 목록은 올해 내가 놓친 콘텐츠를 발견하는 장이 된다. 

66

덕업일치 - 방구석 덕후를 자본의 충실한 노예로 만들기 위한 자본주의의 교모한 기술. 애당초 덕과 업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전환될 뿐이다. 

75

명명백백히 뒷광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와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익명의 누군가'가 바이럴이라는 물꼬를 터주는 일은 작업자의 연대기에 자리할 거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홍보를 하고 싶을 만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매력적이라는 확신, 그동안 우리가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던 건 아니라는 자기 긍정으로 이어진다. 

76

때로는 '널 좋아해'라는 감상적인 고백보다 '넌 쓸만해'라는 노동 시장에서의 냉정한 판단이 더 위로되는 시기를 지나가게 된다. 나의 쓰임을 증명하는 하루가 수당이 되고, 끝이 보이지 않던 한 달이 모여 월 급여가 된다. 그러다 보면 이벤트처럼 연봉협상 일이 다가온다. 물가 상승률을 실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조직은, 직원에게 매해 '희망 연봉'을 의례적으로 묻지만, 그 희망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럴 거면 그냥 '절망 연봉'이라고 하자. 

80

종종 성장은 아주 오래전에 쏘아버린 화살이 삶이라는 과녁에 꽂히듯 매일을 착실하게 살아내는 와중에 찾아오기도 한다. 강박을 버리고 매일을 그저 쌓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작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성장의 제 1조건이다. 

104

타깃 - 개인을 상품의 개별 단위로 이해하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용어. 이로부터 파생된 '타깃팅'도 자주 쓰인다. 자본주의는 인간 군상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시도를 인문학적 호기심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인간성이 사라진 합리적인 상품들로 채운다. 화살에 꽂힌 인간은 피 대신 돈을 토하며 시장의 논리에 충실히 복무할 뿐이다. 

124

'그냥' 하는 게 가능한 사람의 곁엔 대신 생각하고,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조력자가 있다. 1인 작업자가 생각하지 않은 채로 작업에 돌입할 수 있는 경우는 돈이든 사람이든 '조력'이 존재하는 경우뿐이다. 1인 작업자는 작업뿐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며, 실패 또한 온전히 감수해야 하므로 애초에 그냥 한다는 것은 판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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