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민경 Nov 23. 2020

가을의 미미, 계절의 길이

나는 가을을 싫어한다. 면역력이 약해서 피부병을 20년 넘게 앓고 있다. 가을바람이 불면 심해진다. 최악은 환절기다. 바람에 찬 기운이 섞이면 한쪽 코가 막힌다. 가을밤마다 한쪽 코로 숨을 쉬니 피곤하다. 까만 겨울보다 붉은 가을이 무서운 이유는 이렇게 다양하다. 계절의 힘을 막을 수도 없고. 가을의 등 떠밀어 겨울을 견디고, 모가지를 빼고 봄을 기다릴 뿐이다.     


2년 전만 해도 나는 고양이와 함께 살지 않았다. 딸 하나 키우는 것도 허덕이면서 고양이라니.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들만 보면 눈 키스를 보내는 애묘인으로 살았다. 그래도 묘연이라는 말을 믿었다. 집사는 고양이에게 간택당한다는 애묘인들의 전설 같은 말에 기대어 기다렸다. 고양이를 만지면 콧물을 줄줄 흘리는 집사지만 이런 나를 선택해주는 고양이가 존재하기를. 내 손길에 몸을 맡기는 고양이를 만나기를.      


딸이 8살이 되면서 우리는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아파트로 빽빽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경기도 외곽 아파트촌의 풍경은 극적으로 달랐다. 눈에 들어오는 초록의 넓이만큼 마음의 여유도 커졌다. 그해 겨울의 어느 날, 딸과 함께 산책을 나가던 길이었다. 우리 동 앞에는 놀이터가 있어 어린이들로 북적거리는 편이다. 그날은 소리의 긴장이 달랐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끼리 수군거리며 몰려 있었다. 놀이터 앞 화단 안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대차게 들렸다. 분명 아기 고양이의 목소리인데, 데시벨은 우렁찼다. 애절했다. 


덤불을 자세히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딸의 친구가 말했다. “얘, 엄마 찾나 봐요.” 그랬다. 예전에 파주북잔치에 딸이랑 놀러 갔을 때 한 미아 소녀를 만났다. 그 아이의 울음과 이 고양

이의 소리는 닮아 있었다. 당황. 놀라움. 공포. 무서움. 외로움. 배고픔.


귀여운 고양이를 보고 흥분한 어린이들이 접근하고 나는 고양이가 다칠까봐 걱정스러웠다. 고양이를 20년 넘게 키운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기 고양이가 위험한 상황이고 주변에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사람 손이 타면 엄마가 새끼를 찾으러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먹을거리와 물그릇을 마련해서 박스 집을 만들어줬다. 호기심 가득한 동네 어린이들로부터 새끼를 보호하면서 엄마 고양이를 만날 수 있는 외진 곳을 찾았다. 


하루가 지나도 엄마 고양이는 오지 않았다. 아기 고양이는 박스 집이 편안한지 멀리 가지도 않고 그 안에서 자고 먹고 쉬었다. 어린 고양이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데리고 와도 괜찮겠냐고. 고등어 무늬의 아기는 이렇게 우리 집 첫 고양이가 되었다. 놀이터 앞에서 만나 이름을 ‘노리’라고 지었다.


노리가 집에 온 날 품에 안고 다친 데는 없는지 살폈다. 앞발 젤리 아래 표피층의 피부가 뜯겨나가 벌건 살이 보였다. 첫번째 병원에서는 상처가 심각해서 발을 잘라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두번째 병원의 의사는 화상을 입은 것 같다고, 붕대를 이틀에 한 번 갈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발을 자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잘 놀지 못했다. 작은 소리에도 긴장하는 건 고양이 습성이라 해도, 어떤 놀잇감에도 반응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는 모습은 의아했다.


1년 반이 흘렀다. 노리는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수시로 박스 귀퉁이나 뾰족한 철 재질을 이빨로 씹어대는 버릇은 심해졌다. 놀아주려고 해도 별 반응을 하지 않는 노리. 우리만 보면 애교를 부리며 울어대지만 사람이 다가오면 만지는 걸 기꺼워하지 않는다. 어릴 때 다쳤던 경험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긴 걸까. 노리를 볼 때마다 걱정거리가 풍선처럼 커져갔다.     


지구에 나 혼자만 남았다면 기분이 어떨까. 노리를 보면서 사람이 채워주지 못하는 고양이의 외로움을 생각한다. 딸과 고양이 하나만 잘 키우자라는 결심이 흐려졌다. 큰 고양이와 나이 차가 적어야 적응하기 쉽다는 고양이 스승님의 말이 생각났다. 노리의 자매를 만들어주기 위해 만난 아기 고양이가 미미다.

털이 온통 까매서 눈을 감으면 검정 털뭉치로 보이는 미미. 막내로 태어나 영양분이 부족했는지 몸집은 작고 꼬리도 짧았다. 우리는 미미를 보자마자 다시 사랑에 빠졌다. 서울 동쪽에서 한강을 건너 서쪽으로 올 동안, 미미는 차 안에서 방방 거리며 돌아다녔다. 딸은 미미가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했다.


미미는 안방에 3일간 갇혀 지냈다. 거실은 노리의 영역이었다. 나이보다 작은 몸집인데도 미미는 안방이 좁다는 듯이 자유분방하게 뛰어다녔다.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내 베개 뒤. 막내로 태어나 꼬리도 짧고 몸집도 작은 미미는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자는 걸 편안해했다.

새벽 네다섯 시쯤 되었을까. 타닥 소리를 내며 침대 위를 점프하듯이 둥글게 뛰어노는 미미의 움직임을 느낀다. 잠결에 아기 고양이랑 사는 행복감을 만지작거린다. 어릴 적에 엄마한테 강아지 키우게 해달라고 졸라대던 열 살의 나를 떠올린다.

잠을 잘 때는 엉덩이를 내 턱 쪽으로 두고 가슴 위에서 잠들었다. 다리를 다쳐 침대에 올라오지 못했던 노리를 키울 때는 맡아보지 못한 진한 똥냄새였다.     

3일째 되는 날, 안방 방묘창을 사이에 두고 노리와 미미가 처음으로 만났다. 생쥐처럼 재빠른 미미는 앞뒤 재지 않고 노리 쪽으로 달려가려고 해서 막았다. 미미는 작고 방묘창의 틈은 넓었다. 망사 천으로 아래를 감싸서 벽을 튼튼히 만들어줬다. 노리는 첫날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다가 점점 안방 앞에 와서 미미를 보고 갔다. 일주일쯤 되었을 때 모두 방심한 사이 미미는 망사 천을 사다리 삼아 월담했다.


얼떨결에 합사하게 된 둘은 2주 동안 쫓는 자와 쫓기는 자로 나뉘었다. 추격자는 미미다. 큰 언니가 동생한테 도망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확실한 건 노리가 예전보다 밥을 잘 먹고 활기차다는 점이다. 남편은 둘이 되면 똥이 두 배가 될 줄 알았는데 세배가 되었다며 웃었다. 

둘이 함께한 지 3주째 된 날. 캣타워 꼭대기 칸에서 노리와 미미가 함께 털을 맞대며 자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며 ‘지금 이 순간’을 축하했다. 고등어 무늬 발과 검은색 발이 드디어 만났다. 뒤엉켜 자는 둘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또 1주일 뒤. 미미가 다가오면 구석으로 줄달음치던 노리가 달라졌다. 배를 보이고 누워서 미미의 장난질에 냥 펀치를 날린다. 가끔 둘이 레슬링을 하나 싶을 정도로 격투를 벌이기도 한다. 쫄보 노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삶은 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자기 몸집의 배나 되는 노리를 겁내지 않은 미미 덕분이다. 미미의 거침없는 사랑이 쪼그라든 노리의 마음을 펴준 게 아닐까.


미미의 근황을 인스타그램으로 지켜보던 임보인은 놀랐다. 나에게 알려준 미미의 원래 별명은 ‘쫄보’.  쫄보와 쫄보가 만난 것이다. 둘의 거리를 가슴 졸이며 따라가는 동안 눈썹 같은 가을의 길이가 늘어났다. 독한 알레르기 약을 먹어도 괜찮다. 두 고양이의 ‘첫’을 지켜보는 이 가을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우리 가족을 완성해준 미미의 가을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늦된 어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