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민경 Nov 02. 2020

늦된 어른

『처음은 어렵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지 십육 년이 흘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돌아가셔서 친정 식구들과 우리 가족은 늘 크리스마스 휴가 때 만나게 된다. 제사음식을 안주 삼아 다정한 술자리가 벌어진다. 가부장제가 사라진 친정은 편안하고 아늑하다.

아빠가 살아 계셨을 때 나의 가족은 두 조각으로 살았다. 낮에는 평화로운 보통의 가정. 밤에는 시끄러운 폭력 앞에서 숨죽이는 엄마와 오빠와 나. 매일매일 주정을 하는 술 취한 아빠. 숙취로 결근하는 게으른 아빠. 어릴 적에 자식들을 버리고 재혼한 할머니를 원망하는 미숙한 아빠.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부도덕한 아빠. 아빠를 미워할 이유는 차고 넘쳤어도 좋아할 이유는 찾기 어려웠다.


스물세 살에 처음으로 집을 나와 혼자 사는 데 성공했다. 깨끗하게 사라진 불안의 소리. 그 전에는, 매일 밤 술 취한 아빠가 터덕터덕 쇳덩이 같은 발을 끌며 이층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편안하게 널브러져 있는 우리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생쥐처럼 후다닥 방으로 흩어졌다. 오빠보다 내가 늘 빨랐다. 엄마만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둔 채. 독립하게 되니, 밤만 되면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발소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행복했다. 


일 년 후 아빠가 벌인 새로운 사업은 친척의 배신으로 몇 달 만에 망했다. 술에 취해 내 일을 남에게 맡겨두어도 제대로 굴러가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 시작하는 힘은 세고 유지하는 성실함은 부족한 아빠. 우리 가족은 이십 년 가까이 살았던 이층주택을 팔고, 서울 송파구에서 충북 음성군 대소면의 한 공장으로 이사했다. 겨우 취업 문턱을 넘은 나만 서울에 남고 엄마와 아빠, 오빠는 친척 하나 없는 시골에서 살게 된 것이다. 키가 크고 이문세를 닮았던 잘생긴 막내 삼촌을 유난히 따랐다. 그 삼촌이 아빠 돈을 갖고 도망갔다는 어른들 말을 엿들었어도 술주정뱅이 아빠만 원망스러웠다.


술을 매일 마시게 되면 중독이 되고, 알코올중독자는 간암 환자가 되기 마련이다. 밤이 길어진 시골에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셔대던 아빠는 점점 시들어갔다. 또 한 번의 탈출이 간절했다. 사귀던 남자를 부모님 앞에 데리고 간 날. 아빠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술만 마시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술을 가끔 마시고 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부지런한 남자와 결혼했다. 곱고 연약했던 엄마의 엄마로 사는 걸 그만둘 수 있었다. 더 이상 아빠의 주먹에 엄마가 다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회를 놓칠세라 내 삶을 살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산 병원 응급실이야, 빨리 와!” 

결혼한 이듬해 겨울이었다. 우리 부부만 만나면 얼른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던 아빠는 술한테 잡아먹혔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아빠는 의식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빠 옆에서 죄인처럼 서 있는 엄마. 이십 대의 젊은 의사는 왜 마음대로 퇴원했다 다시 입원했냐며 엄마를 혼내고 있었다. 얼어붙은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1인실로, 6인실에서 간호실 근처 빈방으로. 상태가 좋아진 것 같은데 간호사들은 자꾸 아빠의 침대를 병실 밖으로 빼려고 했다. 내일이면 돌아가실 거라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빠와 마지막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사흘이 흘렀다. 아빠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아빠 나이 쉰아홉이었다.     


“엄마, 나빠!”

결혼하고 7년 만에 시험관아기시술을 받고 어렵게 가진 아홉 살 딸.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나를 노려보며 하는 말이다. 나는 술을 진탕 마시지도, 불성실하지도 않은 엄마인데. 딸은 하루에도 열 번씩 엄마가 나쁘다고 화를 낸다. 자기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고, 잔소리한다고, 버럭 화를 내는 엄마가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눈에 불을 켜고 아빠한테 바락바락 대들 때마다 나중에 너랑 똑 닮은 딸 낳아보라는 말이 예언처럼 도착해 있다.


딸을 낳고 알았다. 모든 부모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잘 해내고 싶은데 잘 안 될 때가 많다고. 사람은 모두 부족하다고. 어떤 어른은 철이 늦게 난다고. 나도 아빠처럼 늦된 어른이라고.

딸이 조금이라도 퉁명스럽게 대꾸하면 한없이 섭섭했다. 그럴 때면 또 아빠 생각이 났다. 부모도 자식에게 사랑받고 싶구나. 아빠도 많이 외로웠겠구나. 내가 마음껏 악을 쓰며 반항할 수 있었던 것도 아빠한테 사랑받았기 때문이구나. 내 뺨을 때린 날 아빠도 많이 아팠겠구나.


아빠가 곁에 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은 추억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하나씩 늘어간다. 야구장에서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다 같이 해태를 열광적으로 응원했던 일, 여름휴가 때 주문진 바닷가에서 아빠가 코펠에다 김치찌개를 끓여줬던 일.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미의 집을 선물해준 일, 책 좋아하는 딸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봐줬던 일. 책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중요한 임무를 받은 것처럼 쏜살같이 다녀왔던 일.     

나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는 딸 덕분에 아빠를 불러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억을 더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어두운 이야기는 쏙 빼고 밝은 에피소드를 발굴했다. 아이에게 옛이야기처럼 반복해서 아빠 이야기를 들려주니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번져나갔다. 그만 미워하고 싶었다.      


어느덧 피부에 새긴 원망이 햇살을 받은 고드름처럼 녹아내렸다. 딸과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그림책을 읽어주며 보낸다.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려고 애쓴다. 가족일수록 사이좋게 지내려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아빠의 죽음에서 얻은 배움이다.                              


작가의 이전글 책방 여행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