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을 위한 서바이벌 연대기 ➂외국계 공공기관
아이를 잉태한 이래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여덟 번째 집에 살고 있다. 그 사이 여섯 번을 이직하여 일곱 번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11년 동안이나 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유랑의 삶을 살게 된 까닭은 단 하나, 지금까지의 그 어떤 환경도 ‘일-가정 양립’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아이 등원시키고 출근하기’가 가능해지다
가난뱅이 프리랜서 가장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자 다시 직장을 구하기로 했다. 얼마 후 유럽 어느 나라에서 한국에 파견한 공공기관의 경력직 채용시험에 응했다. 좋은 직장이 다 그렇듯, 사무실이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다는 치명적인 조건만 빼고는 여러 모로 괜찮은 곳이었다.
서울 밖 위성도시에서 못해도 한 시간 반은 잡아야 하는 거리, 출근시간이 10시라면 아이를 손수 등원시키고 다녀볼 만 했다. ‘을’ 노릇에 찌들어 있던 나는 최종 면접을 통과하고서야 10시 출근 가능성을 타진해볼 용기를 쥐어 짜낼 수 있었다. 그 나라 보스 앞에서 세상 가장 딱해 보이는 표정으로 구구절절한 사정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 옹색한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 보스는 내게 답했다. “물론이죠! 여기엔 육아를 위해 주 2회만 출근하는 직원도 있는 걸요!” 그 한 마디로 나는 주 35시간 일하는 시간제 계약직이 될 수 있었다. 원래 제시됐던 임금에서 정확히 8분의 1을 깎았다.
통근을 포함하여 내가 집을 비우는 시간은 하루 10시간 30분 안팎. 정해진 어린이집 운영시간은 일일 12시간이었지만 실제 그렇게 운영하는 곳은 주변에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결국 다시 육아 일부를 엄마에게 아웃소싱하기로 했다.
6시 반에 기상해서 출근 준비, 등원 준비, 집안일을 하다보면 금세 시간이 동난다. 8시 23분에 아이를 어린이집 셔틀버스에 태워 보낸 뒤 부리나케 달려 10시까지 출근했다. 저녁 6시가 되면 퇴근과 동시에 러시아워 교통체증에 시달렸고 거의 8시가 되어야 부모님 댁에 가서 아이를 만났다. 거기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우리 집으로 귀가하면 밤 9시 반. 어린이집 수첩을 확인한 뒤 조금 놀아주다 씻기고 재우면 어느덧 자정이 넘는다.
그나마 부모님께서 아이를 하원시켜 저녁을 먹이고 내 몫의 저녁까지 차리고 치우기를 일임해주셨기에, 직장에서 하루 7시간 노동 조건을 수락했고 칼퇴근을 보장했기에 기나긴 통근시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일이었다.
강제 칼퇴근 직장의 보스가 내게 미안해 한 이유
다른 직원들은 모두 출장가고 그 나라 보스와 단 둘이 점심식사를 하게 된 날이었다. 차라리 업무적인 대화는 아는 영단어를 드라이하게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소통이 되니 나은 편이었다. 캐주얼한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 둘이서만 나누자니 퍽 부담이 됐다. 말이 길어질수록 영어 실력이 뽀록날 것 같은 두려움에 리액션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보스가 말했다. “전에 계약할 때 임금을 다 보전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해석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말씀해달라며 되물었다. “어차피 아침에 집에서 나서는 시간은 우리랑 비슷한데 임금은 한 시간 어치 덜 받잖아요.” 그 말은 무려 ‘직장 때문에 장거리 통근에 쓰는 시간을 업무시간으로 간주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의미였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너무도 파격적인 발상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보스의 “Sorry.” 뒤에 “You’re welcome.”이라 엉뚱한 리액션을 하고선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곳엔 노동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깨는 제도가 또 있었다. 원래도 야근이 없지만 행사 등으로 불가피하게 계약시간 외 근무하게 될 경우엔 반드시 일주일 안에 해당 초과노동시간 만큼 쉬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무슨 수를 써도 연간 계약된 시간보다 많이 일할 수가 없는 구조다. 아무리 더 일하거나 더 벌고 싶어도 말이다. 심지어 동료의 송별식이나 환영식을 위해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 그 시간 역시 업무로 간주하여 다음날 근무시간을 줄였다. 대사관에서 여는 파티에 참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회식 아니면 야근, 매일 둘 중 하나는 필수인 구태한 기업문화에 절어 있던 나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일이 너무 많으면요?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는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치지만, 만약 연말에 일이 엄청나게 몰려서 초과노동을 해야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곳 동료들은 오히려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가며 지레 겁을 먹는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가진 리소스만큼만 과업을 설정하니까요.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인력을 더 뽑거나 일을 줄여야겠죠?”
물론 이 갭 차이의 일부는 ‘외국계’가 아니라 ‘공공기관’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팩트가 하나 있다. 그 나라는 OCED 가입국 중 최단시간 노동하는 나라고, 대한민국은 그 반대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워킹맘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
나는 행복했다. 학생이라는 공고한 신분을 벗어난 이래, 만 5년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기록해두기까지 했다. 막 좋아 죽겠는 행복이 아니라 늘 마음이 편안하고 걱정이 없고 예민할 것 없는 상태랄까. 누군가 내게 ‘잘 지내?’ 하고 안부를 물으면 ‘잘 지낼 리 있나’ 또는 ‘그냥 사는 거지 별 거 있나’라는 자동반사적 대답이 아니라 ‘어. 요즘 진짜 잘 지내’라고 대답하게 되는 그런 나날들.
따지고 보면 대기업 시절에 비해 내게 주어진 노동의 몫이 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진 않았다. 전에는 출근 준비 후 새벽 같이 길을 나설 시간, 이제는 내 출근 준비와 더불어 아이 등원 준비에 가사를 챙기는 몫까지 하고 있었다. 전에는 야근이나 회식을 하고 있을 시간, 이제는 아이를 전적으로 돌보고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그 행복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업무환경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내 할 일만 잘하면 되고, 비합리적인 동료 없고, 무의미한 보고서질과 취합질 없고, 하루 7시간 근무 후 땡퇴하고, 개인의 삶을 존중 받으며 사니 삶의 만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고 맥락주의에 찌든 우리 사회의 눈치 중심 커뮤니케이션에서 벗어난 것도, 업무로 관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수평적인 가치관을 가진 것도 큰 몫을 했으리라.
행복의 또 다른 이유는 나와 아이가 정서적으로 동반자가 되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며 함께 흥분하고,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며 함께 울고, 영화 ‘겨울왕국’ OST를 나눠 부르고, 드라마 속 무서운 장면을 보며 서로의 눈을 가려주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울 때면 아이가 다가와 위로를 건넸고, 제가 기쁠 때면 내게 달려와 뽀뽀를 했다. 아이는 나의 과격한 운전을 꾸짖었고 나의 괴상한 요리를 칭찬했다. 우리 사이에 비로소 ‘관계’라는 게 존재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충족감이었다. 어린, 홀로인, 불안정한, 미완의 상태로 유일한 가장이자 양육자로 사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부담과 압박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외부 의존을 최소화한 채 내 힘으로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고 가정을 부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낸 것 자체가 내게는 비할 데 없는 성취였다.
과하게 의존하지도, 과하게 구속받지도 않는 그 상태는 5년 간 갈구하던 ‘이상적인 삶의 밸런스’ 그 자체였다. 나는 그 균형을 온 몸에 새기려 애썼다. 또다시 삶이 무너지고 휘청대고 갈팡질팡할 때 어떤 좌표처럼 기억되는 이 균형을 복원해내기 위해서. 그 땐 이제까지보다 훨씬 덜 마모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게 되길 기대하면서.
꿈의 직장이 내게 남긴 것들
안타깝게도 꿈의 직장이라 일컬을 만한 그 곳에서의 생활은 길지 않았다. 그 나라의 경제위기가 지속되자 우리나라에 단 한명의 직원만을 남기고서는 사업을 철수했다.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파견한 기관들도 대부분 문을 닫거나 사업이 축소됐다. 그토록 노동권을 중요시하고 적게 일시키고 직원 복지에 힘썼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나는 다시 백수 가장이 됐다. 그러나 이렇게 단타로 치고 빠지며 연명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마다 삶을 스스로 조율해나간다는 측면에서는 경로가 정해져 있는 정규직보다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측 불가능으로부터 오는 불안에 담대하게 맞설 배짱도 좀 길러진 것 같았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가 내 앞길을 채우게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불안 때문에 종일 직장에 매인 몸이 되어 다시는 오지 않을 아이와의 시간을 몽땅 빼앗기는 어리석은 짓은 경계하며 살 거라고 나는 다짐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육아 관련 제도는 더디게나마 변화를 보였다. 어린 자녀가 있을 경우 하루 2시간 단축 근무하는 제도가 생겨났고, 양육수당이라는 보편적 현금복지까지 등장했다. 주 52시간제로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믿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10년 만 더 늦게 아이를 낳았더라면 그 때만큼 처절하게 아이를 키우진 않았을 거란 억울함이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 나라 근무환경과 견줄 만한 직장은 내 앞에 단 한 군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눈치 보지 않고 하루 열 시간 반 이상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만한 어린이집 역시 여전히 찾기 어렵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보육 환경은 더 열악해진다. 노동시간이 줄든, 공보육 시간이 늘든 어느 지점에선가는 둘이 만나야 하는데, 사회가 바뀌는 속도는 아이가 자라는 속도를 조금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수 많은 양육자들이 직장에서 탈락하고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퇴근까지 학원을 전전하고 있다. 갈 길이 멀다. 아직 멀었다.
*칼럼니스트 송지현은 사회생활과 잉태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11년차 워킹맘’이자 그동안 다섯 번을 이직(당)한 ‘프로 경력단절러’입니다.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서 2인분의 몫을 해야 하는 ‘시간빈곤자’이나 실상은 1인분, 아니 0.5인분조차도 할까 말까 하기에 스스로를 반쪽짜리 ‘파트타임 엄마’라 칭합니다. 신문방송학 전공 후 온갖 종류의 대필을 업으로 삼아왔지만 이번 연재를 통해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된 ‘생계형 글짓기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2020년 <베이비뉴스>에 기고한 칼럼을 브런치에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