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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지 Oct 06. 2023

모성애라는 광기에 대한 넋두리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엄마는 너를 위해 (글 박정경, 그림 조원희)

좋아하는 분의 SNS에 올라온 피드를 보다 초마다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찍어가며 바람처럼 주문한 그림책이 있었다. 퇴근한 남편과 같이 저녁 준비를 하다 새삼스레 "나 오늘 그림책 하나 주문했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왠지 그 책을 샀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다. 무슨 그림책이냐 묻는 남편의 말에 답을 하려는데, 당황스럽게도 갑자기 목이 메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요상한 침묵에 내게 고개를 돌렸던 남편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용히 하던 요리를 이어갔다. 이제 아들은 더 이상 내게 아픈 손가락이 아닌데, 내 머릿속 아픈 기억들은 아픔을 싹 걷어내기엔 너무 켜켜이 쌓였나보다.

도착한 책을 마주하니 막상 펴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책 표지만 찬찬히 만져보고 있는데, 그새 다가온 딸이 먼저 읽어봐도 되냐 묻고는 책을 가져갔다. 책을 읽어내려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운아, 너 자폐라는 거 알아?"
"어- 지폐는 아는데 자폐는 몰라요."

딸아이의 순진한 답에 풉하는 웃음과 함께 고였던 눈물이 똑 떨어졌다.

기억 속 아들의 모습이 도로로 굴러간다. 아들이 '고양이같다'고 표현하셨던 어린이집 선생님, 장난감 기차의 바퀴가 의미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몇십분이고 보고 있는 아들의 뒤에서 무기력하게 멍을 때리던 여름밤, 대답없는, 나를 보지않는 네가 답답해 화를 내고 소리치던 나의 모습.


글을 쓰기 시작하면 한없이 침잠하는 게 싫어 아주 가끔씩만 블로그에 써내려갔던 아들의 육아일기를 열어보았다. 슥슥 손을 밀어 캡쳐를 해나갔다. SNS에 그 일기들을 올릴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내가 많이 살만해졌단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고 있어서기도 하겠지만, 내가 이젠 아들을 아들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바라볼 여유가 생긴 때문이겠지.

친한 지인과 이런 얘길 했었다. "OO이가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얼마나 재미없고 얼마나 편협한 삶이었을까. 딸래미 내가 잘 키워서 잘 자란 줄 알고 그 아이를 있는 힘껏 밀어 붙이면서 아이로 버티는 내 자존감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대고 애쓰며 살았을텐데. OO이 덕분에 내가 진짜로 풍성하고 감사한 삶을 알게 되었어요."

엄마는 너를 위해 뭐든, 전혀 무섭지 않다는 고백을 하게 해준 내 삶의 보석.



집은 육체적으로 불결한 것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추잡한 곳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붐비며 생활하다가 일어나는 여러가지 마찰로 숨통을 조이고, 온갖 감정이 뒤섞여 악취를 풍기는 토끼 굴과도 같았다. 그야말로 누추함 그 자체였다. 게다가 가족간의 친밀함이란 또 얼마나 답답한 것인가? 위험하고 음란하고 정신나간 짓이다!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자식들을 품었다. 마치 새끼 고양이를 품는 어미처럼 '자기' 자식들을 말이다...... 
-멋진 신세계(푸른숲주니어), 64p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한 장면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통제관의 입에서, 집과 어머니라는 단어가 나오자 학생들은 그 음란하고 지저분함에 어쩔 줄 몰라한다. 생물학적인 부모가 있었다는 자체가 이들에겐 원시인들의 삶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충격 그 자체다. 원서로 읽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부분이 한글로 읽으며 확 눈에 들어온 건 '미친 사람'이라는 단어가 이 한국인의 눈에는 Maniacally보다 백번 천번 강렬하게 와닿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추잡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자식들을 품는 어머니'. 과격하게 들리지만 잔인하고 객관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틀릴 것 없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따르는 '희생'이나 '고귀함'이라는 단어를 나라를 생각하는 참전용사가 '애국'이란 단어에 가슴을 자랑스레 내밀듯 받아들이기에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겪었다. 1년 여 전, 눈물로 읽은 그림책과 함께 적어두었던 나의 고백이 그 누군가에게는 '광기 어린 다짐'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픔이나 분노없이 그저 서늘하게 스친다. 




지난 주, 아버님이 급작스레 우리 집 근처 병원에서 수술을 하시게 되면서 시골에 계시던 어머님이 우리집에서 추석 연휴를 며칠 보내시게 되었다. TV가 안방에 있기도 하고 안방 침대가 크기도 하니 어머님이 아이들과 안방에서 지내시는게 편하겠다 싶어 한사코 말리시는 걸 아이들 구실삼아 안방을 내어드린 후 나는 딸 방에서, 남편은 아들 방에서 자기로 했다. 이사한 지 채 한달이 되지 않아 새 가구의 나무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아이의 방에서 아이의 침대에 눕는데, 순간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큼한 행복이 코밑까지 올린 옅은 올리브색 이불에서 올라왔다. 우습게도 <멋진 신세계>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이 이불 안에서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순간 아이가 사무치게 부러워졌다. 온전히 너만 존재하는 이 방에서, 오롯이 너만의 세계에서 너는 독립된 존재로 매일 밤 꿈나라로 가는구나. 결혼하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내 방이 있던 사람인데도, 나는 왜 지금에서야 '나만의 방'에 주어지는 엄청난 가치를 깨달은 것일까. 

뫼비우스의 띠같은 집안일은 진즉 제껴두고라도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엮인 인간관계, 놓치는 게 있을까 늘 불안한 나의 많은 업무들, 그것들의 중심에 있는 나의 핸드폰,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엄마'라는 이름표. 순간 나는 <멋진 신세계>가 과연 정말로 디스토피아 소설인가에 대한 의구심까지 일어버렸다. 이사와 명절, 시아버지의 입원과 수술, 해야 할 많은 일과 아이들 개학까지 한꺼번에 몰아닥쳐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나는 그렇게 아이의 이불 속에서 토끼 굴같은 지금의 생을 벗어나 잠시나마 나만의 몽상에 빠져들었다. 레니나까진 바라지도 않고, 페니쯤 되어도 재미진 인생이겠다고 생각하는 내게 그날 밤만큼은 <멋진 신세계>가 실로 정말 멋진 신세계였다. 


"우리 아기, 우리 아기......!"
"어머니!"
광기에는 전염성이 있다.
"사랑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귀하디 귀한......."
어머니, 일부일처제, 그리고 연애. 거품을 부글부글 일으키며 세차게 솟구치는 물줄기. 욕구를 분출할 데가 단 한 곳뿐일 때는 그럴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우리 아기. 구시대의 가엾은 인류가 그토록 비참하고도 광기 어린 삶을 살았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들이 살던 세상은 심리적 안정이 허용되지도, 말짱한 정신으로 도덕적이고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되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연인들, 그리고 갖가지 금기 때문에 복종을 훈련받지 못했고, 온갖 유혹에 따르는 양심의 가책과 질병에서 비롯된 고통,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가난 때문에 사람들은 억지로 강한 척해야만 했다. 그렇게 강한 척하면서 어떻게 안정된 삶을 누릴 수가 있겠는가? 아무 희망도 없이 고독하게 홀로 고립된 상태에서. 
-멋진 신세계(푸른숲주니어), 70p


헉슬리는 어찌 이렇게 어머니라는 존재를 뾰족하게 관통했을까. 그 어머니의 삶 역시 이러해 보였던걸까. 어머니란 존재는 오래 전부터 그러했다. 심리적 안정이 허용되지도, 말짱한 정신으로 도덕적이고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되지도 않았다. 홀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살리느라 고생한 이야기에 익숙하고, 홀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들여 자식들을 생고생시키는 장본인으로 익숙한 것만 봐도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며 피식 웃음이 나지 않는가. 희생과 인내라는 포장좋은 단어로 갖가지 금기와 불안의 테두리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어머니들은 고독하고 외롭지만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존재였다. 그녀들의 광기는 전염성이 있는게 아니라, 외려 태초부터 DNA 안에 박혀있던 게 맞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의 아이들이 나에게서 남이 되어 내게 자녀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나에게 가정이라는 소속이 사라진다면, 나는 근심없이 행복만 취할 수 있을까? 아들로 인해 뭉그러진 마음도 더 이상 없고, 딸에게 퍼붓고야 후회하던 잔소리로 괴로울 마음도 없고, 엄마로서 견뎌야 할 많은 인내와 희생도 없는 그런 삶이라면. 고독하게 홀로 고립된 상태에서 나는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될까? 서로에게 연결될 것이 없고 유대할 것이 없는, 오로지 유희에 의한 잠시간의 끈적거림만 존재하는 개개인의 사회는 내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 줄까.




어젯밤, 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네가 ____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순간 으레들 하는 말처럼 '행복'이라는 단어를 넣으려다 멈칫하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행복'이라는 두 글자 대신, 구구절절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탕후루를 먹으면 정말 맛있잖아. 돈으로 좋아하는 물건을 살 때도 정말 행복하지. 그런데 그 맛이 주는 행복은 얼마나 될까? 엄마는 나이들면서 점점 더 좋아하는 물건의 가격이 비싸지는데, 아무리 비싼 물건이어도 그 물건이 내 것이 된 기쁨은 하루가 안 가더라. 그런데, 자리에 앉기 싫은 마음을 이겨내고 공부를 끝냈을 때의 기분이 어때? 혼자 있는 친구를 위해 하고 있던 재미난 걸 내려놓고 그 친구의 곁에서 같이 놀았을 때의 마음이 어때? 그 마음과 탕후루를 먹었을 때의 마음이 같은 것 같아?

엄마는 그 마음이 결국 살아가는 힘인것 같아. 탕후루나 좋아하는 물건은 숫자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비교가 될 수 있지만, 너의 기분이나 뿌듯함은 감히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너만의 것이야. 너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그거야. 난 네가 단순한 '행복'을 찾기 보단, 더 깊은 '행복 이상의 것'을 누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조언이 훈계 비슷한 잔소리가 되더니 결국은 내게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었다. 모성애라는 광기로 견디며 사는 엄마의 삶에 그 부메랑이 꽂힌다. 어머니는 힘들다. 늦된 자식은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재주없는 집안일은 나를 자괴감에 빠지게 하며, 만족없는 잔소리는 내게 죄책감을 가져다 준다. 나는 자식을 품어 젖을 먹이려 애를 쓰는, 윤기없는 털에 젖가슴이 축 처진 어미 고양이다. 아니지. 어미 고양이가 자기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 애쓴 것이 생물학적 본능이었다면, 나는 그 본능에 내가 채우지 못한 욕심까지 자식에게 덧입혀 만족을 느껴야 하는 우매한 인간 어미다.


그러나 차마 당당히 빨갛게 붉지도 못한 다홍빛 광기가 이미 내 몸 안에 흐르는 것을 나는 원망하지 않는다. 미친 사람으로 살기를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마는, 미치지 않은 사람의 자유로운 가벼움도 끌리지 않는다. 이 글의 초입에 아들을 향한 고백을 남기며 '내 뜻과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재미없고 편협한 삶'보다 '힘들고 불확실함 속에서 느끼는 다이나믹하고 감사한 삶'이 더 좋노라고 고백한 순간, 나는 이미 모성애라는 광기가 주는 짜릿한 묘미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어머니로서의 삶은 힘들테고, 나는 앞으로도 종종 막연히 자유를 동경하겠지만, 울지는 않을 거다.


저 둘 사이에 얼마나 강렬한 감정이 솟아날까요? 난 종종 우리에게 어머니가 없어서 은연중에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어요. 어쩌면 당신도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게 뭔가를 상실했는지도 모르죠. 당신이 낳은 아이를 안고 저기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봐요.......
-멋진 신세계(푸른숲주니어), 1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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