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끝
독일의 독재자이자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아돌프 히틀러. 그가 걸어온 면면을 뒤져보면 다소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황당한 것. 그 많은 독일인들은 무슨 이유로 이렇게 허술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겼을까.
실제로 히틀러와 나치당이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 체제를 확립하는 순간까지. 이들이 독일의 정권을 사로잡는 과정을 보면 이해가 되지않는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어설픈 쿠테타(맥주홀 폭동)에 어설픈 선동(게르만 우선주의). 여기에 신이 도왔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우연과 행운의 연속들(국회의사당 방화, 2차 세계대전 개전 후에는 초기 프랑스의 이해되지 않는 헛발질 등). 분명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당을 막을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스스로를 광신과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1차 세계대전 패망에 따른 독일의 자존감 하락. 베르사유 불평등 조약. 심각한 불황. 사회적 불안 등등등. 그러나 가장 확실하고 예리한 분석은 미국의 언론인 밀턴 마이어가 쓴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에 나온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독일에 거주하면서 나치에 가담했던 열 명과 인터뷰를 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의 비극은 겁에 질려 있거나 자신의 안위에 갇힌 대다수 독일인이 자초한 결과" 즉. 독일인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질린 상태에서 자신들이 보고싶은 것만 봤고, 그 연장선에서 비현실적인 선동에 나서는 나치당에 매료되어버리고 만 겁니다. 팍팍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종종 비현실적이지만 단순하고 달콤한 언사를 늘어놓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원리와 같다고나 할까요.
중국, 중국?
IT 기자이면서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인접국이자 최대 무역국인 중국과 한국 경제의 흐름을 자주 들여다보는 편인데...솔직히 중국이라는 나라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앤트그룹 상장 중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솔직히 미국식 사회경제체제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중국이 전근대적으로 보이면서도 뭔가 알듯 모를듯 미묘한 곳이 바로 중국입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하드웨어, 즉 물리적 제조업의 단계에서 한국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살짝 다른 것 같습니다. 아마 미국과 반도체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겠으나..전통적인 제조업 단계에서 중국은 한국에 지나치게 강압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오히려 협력을 하고 싶어합니다. 화웨이코리아만 봐도 한국과의 유대를 설정함에 있어 왠만한 실리콘밸리 한국 지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제안을 하곤 합니다. 결국 이 하드웨어 제조업 분야가 워낙 오래된 섹터인데다 미국의 직접적인 타격이 벌어지고 있고, 민감한 글로벌 공급체인의 복잡다변함이 중국의 이러한 분위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좀 얄짤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강압적입니다. 이제 차이나 리스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게임사업이 대표적입니다. 중국의 강압적인 행태에 따른 리스크가 커지고 있어요.
중국 게임사 셩취게임즈(전 샨다게임즈) 등을 대상으로 했던 '미르' IP(지적재산) 저작권 침해 소송을 치른 위메이드만 봐도 그렇습니다. 비록 승소했으나 위메이는 상대방의 말도 않되는 '지랄'에 속을 끓여야했고 한동안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습니다.
샤이닝니키 사태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수준입니다. 지난 10월 말 한국 서버를 오픈한 샤이닝니키의 신 캐릭터가 한복을 입고 등장하자 일부 중국 네티즌들이 한복은 중화민족의 것이라 우겼고, 논란이 커지자 개발사는 "한복은 자랑스러운 중국의 문화입니다"라는 희대의 개드립을 남기고 서비스를 종료, 심지어 한국 게이머들에게 제대로 된 환불 공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북공정의 또 다른 버전인가 싶기도 한데. 평소 환단고기의 환빠들을 싫어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도 환빠정도 되는 카드는 빼들어야 하나?
사실 게임업계는 불과 몇 년전만해도 중국의 위에 한국이 있었습니다. 중국 게임사들은 한국 게임사들의 게임을 소중히 받아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카피했고요. 그 결과 한국 게임사들은 어느순간 중국 게임사들의 발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이제는 중국 게임사들이 한국 게임사들에 갑질을 하는 순간까지 왔습니다. 그 사이사이 중국 게임사들은 한국 게임사들의 지분도 열심히 줍줍했고요. 심지어 중국 내 한국 게임사들의 판호를 묶어두고 자기들이 다 해먹고 다닙니다. 그 연장선에서 위메이드는 소송전을 벌여야 했고 샤이닝니키 사태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심지어 한국 게임사들이 중국 게임사들과 도매급으로 몰려 타격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인도 국경분쟁이 한창인 가운데 인도 내 배틀그라운드 모바일(PUBG Mobile) 서비스가 종료되었으며, 이는 인도 정부가 배급사인 중국 텐센트를 제재한 여파입니다. 배틀그라운드 개발사 펍지의 모회사 크래프톤은 범 텐센트 기업으로 낙인이 찍혔죠. 갑질당하는 것도 억울한데...이제는 중국의 신하가 되어 외부에서 같이 얻어맞는 처지가 됐습니다.
게임 외 분야에서도 이런 일 많이 벌어집니다. 단적인 사례가 방탄소년단 사태에요. 지난 10월 19일 중국 물류업체 윈다의 한국지사는 웨이보를 통해 방탄소년단 굿즈 배송을 중단한다고 밝힌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이 밴 플리트 상을 수상하며 “양국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 및 여성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자 중국인들이 발끈했고, 이 과정에서 윈다가 중국인들을 모멸했다는 이유로 방탄소년단 굿즈 판매를 중단했어요.
비록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말도 나오고, 윈다의 실험은 아미들의 반격에 힘을 쓰지 못했다는 평가가 우세합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이 가진 편협한 사고방식의 단면이자 미중 갈등 국면에서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려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중국 공산당의 아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화 제일주의라는 정신, 소프트웨어
게임도 그렇고 비게임도 그렇고,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견이지만, 하드웨어는 당장 미국과의 전쟁 등 후달리는 경향이 있어 우군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는 상대적으로 사안이 덜 중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소프트웨어는 정형화된 물체가 아닌 인간의 심리를 장악하는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정신의 영역이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중국의 내부 사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201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사실상 시진핑 주석 장기집권체제를 강화했습니다. 블룸버그는 "중국의 정치 기반인 집단지도체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면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길을 걷는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나아가 지난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9기 5차 전체회의(5중전회)는 시 주석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공작 조례까지 승인했습니다.
한 마디로 시 주석 권력강화입니다. 이럴 때 위정자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방법은 바로 민족주의입니다. 최근 항미원조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은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며 강력한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면서 '금강천'(金剛川)과 같은 희대의 국뽕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그 연장선에서 정신. 즉 소프트웨어는 포기할 수 없는거죠. 쯔위 사태가 있었고 블랙핑크 맨손 판다 만지기 논란이 과연 우연일까요? 샤이닝니키가 과연?
다만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며 대중이 원하는 아름다운 그림만 보여주는 것은, 사회의 경직성을 키우는 단계를 넘어 위험한 정치권력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중국에게서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망상일까요?
플랜B가 필요하다
한 때 대만은 아시아 드라마의 메카였습니다. 판관 포청천과 꽃보다 남자 등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콘텐츠 강국 대만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었으며, 각국에서 다수의 리메이크 제작을 끌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대만의 영상제작 시스템은 파탄 났으며 주요 방송사의 시청률은 바닥에서 기어가고 있습니다. 대만의 안방극장은 외산 드라마가 채우고 있으며, 최근까지 프라임 시청시간인 오후 9시에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기현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시청률이 나온다는 이유죠.
대만의 영상사업이 파탄 난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후반 100개에 달하는 케이블 방송사를 무차별 허용하며 치킨게임이 벌어졌고, 그 틈을 노려 중국의 자본력이 침투해 대만의 영상사업 시스템 노하우를 통째로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우수한 대만 영상제작 인재들이 중국으로 넘어갔으며 대만 콘텐츠 사업은 자생력을 상실했습니다.
대만 정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국 영상사업에 직접 투자를 단행하는 등 반격에 나섰습니다. 한국 tvN 드라마 <도깨비>가 대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당시 차이잉원 총통이 직접 나서 자국 영상사업에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평가가 중론이죠.
중국은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으로 체면을 구긴 후 서구에 짓밟힌 쓰라린 역사가 있습니다. 이후 도광양회를 거쳐 대놓고 대국굴기를 선언하고 자국민들을 선동하며 팽창하려 합니다. 미국과 싸우면서 중화제국의 건설 야망을 불태웁니다. 그 연장선에서 소프트웨어는 포기할 수 없기에 더욱더 사회는 경직되고, 더욱 결속하면서 더욱 단순해지고 있습니다.
이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답은 없지만, 최소한 이 파도를 넘길 플랜B가 필요합니다. 일단 중국은 버릴 수 없습니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버릴 수 없죠. 그러나 차이나 리스크라는 수동적인 후폭풍을 당연하다는듯 얻어 맞을 필요도 없습니다. 최소한의 우리것을 지킬 수 있는 플랜B가 필요합니다.
그 구체적인 답은? 신시장 개척, 정부의 각성 등이 답에 가까울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 이면의 진짜 플랜B의 전제는 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단기간의 성과에 매료되어 우리 것을 모두 내어주지 않는 것. 민족주의에 똘똘 뭉친 중국의 감성을 제대로 만족시켜 주는 것. 혹은, 제3의 파트너를 찾는 것...그 다음은? 이제 찾아야죠. 격렬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