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맞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옛 생각이 드네요.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 선뜻한 가을바람이 편린처럼 흩어지는 계절이 왔기 때문일까요. 부쩍 차가워진 공기의 물결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잊고 있던 노래의 한소절을 불러봅니다. 우리집은 어려서부터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한번 한적이 없었고 일터네 나가신 어머님 집에 없으면 혼자서 그냥 스파게티에 피자 시켜먹고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쵸 뭐. 다들 그렇잖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경제종합지 이코노믹리뷰가 위치한 서울 인사동은 유명 관광지입니다. 갑갑한 서울의 틈바구니에서 서툴게나마 또렷한 하늘을 볼 수 있는 몇 없는 곳이에요. 한국사람은 물론 독일 일본 아랍 관광객들이 몰려와 대성황입니다. 비록 마감이 끝나면 터덜터덜 걸어와 자리를 잡고 갈매기에 소주 한잔 털어넣던 아저씨들의 공간은 풀메한 MZ들의 성지가 되었고 얇은 주머니 사정에도 두툼하게 배를 채울 수 있던 칼국수집은 인스타 맛집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참 고즈넉하고 따뜻한 동네입니다. 매일 관광지로 출근하는 맛도 쏠쏠해요.
바로 그곳에 안녕 인사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옛 청춘의 성지인 쌈지길 정면. 조계사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는 건물인데요 그 안에 GS25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좀 재밌어요. 평범한 GS25가 아니거든요. 입구에 들어서면 위잉 치킥. 위잉 치킥. 로봇팔이 움직이며 커피를 타주고 뭘 또 막 팔아요.
GS 25의 중요 매장이라 아르바이트생도 모두 정직원이어서 고급 판매 스킬을 직접 체감할 수도 있지요. 정식 명칭은 미래 체험형 매장 ‘GS25 그라운드블루49점’입니다. 좋은건 다 같다 붙인것 같아 간지작살입니다. ‘미래형 놀이터’를 컨셉으로 리테일테크 체험존, K푸드 스테이션, K누들 챌린지 스테이션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 중앙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고피자 로봇입니다. 네. 맞습니다. 고피자. 어린 시절 미국 캐앨리포오뉘아에 거주하다 한국에 들어온 후 무려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초엘리트의 길을 걷나 싶더니 갑자기 수십만 키로미터를 탄 중고 푸드트럭을 구매해 장사를 했던 임재원 대표가 설립한 바로 그 회사. 그 회사의 로봇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맛이로구나!
GS25의 미래 체험형 매장 GS25 그라..뭐시기에 있는 고피자 로봇은 로봇팔과 고븐 미니, AI(인공지능)를 기반으로 토핑 종류, 순서, 토핑량 등을 제어 및 검열하는 시스템(AI 스마트 토핑 테이블·AI STT)과 냉동피자를 자르고 오븐에 투입하는 스테이션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고피자의 냉동피자를 알맞게 커팅해 가열한 후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냉동피자를 그냥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되는거 아닌가? 뭣하러 굳이 이 기계들을 통해 내가 피자를 섭취해야 하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했던 제가 냉동피자 잘알못이었다는 것을 알게된건 불과 8분이면 충분했습니다.
일단 컨셉은 우주항공기술이 냉동지파를 맛깔나게 구워준다는 설정입니다. 오븐에 피자를 굽는 과정을 화성의 표면에 비유하며 재밌게 꾸몄더군요. 로봇팔과 커팅기계 등을 실제 우주항공기술에서 쓰이는 기술들에서 영감을 따왔다고 합니다.
자. 그럼 요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을 하고 결제를 하면(지금은 카운터에서 결제를 해야 합니다) 됩니다. 그럼 안쪽의 로봇들이 마치 스마트팩토리처럼 움직이는데요. 일단 두산로보틱스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로봇팔이 냉동피자를 꺼냅니다. 그리고는 바람의 검심 겐신의 비천어검류에 필적할만한 날카로운 날들이 가차없이 피자를 도륙...아니 커팅합니다.
키오스크로 피자를 주문하는 임재원 대표
이후 피카츄 백만볼트를 연상하게 만드는 전기 고븐 미니가 고피자를 쩌릿하게 감전시켜 맛있게 구워냅니다. 그리고 상자에 담아 띵. 하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피자가 나옵니다. 대략 걸린 시간은 8분이더군요.
임재원 대표와 함께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는데요. 둘이서 방금 점심식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기에 왠지 계면쩍어 안먹으려고 했는데...심지어 점심 식사때 임 대표님은 음식을 반이나 남겼고 전 국물까지 게걸스럽게 핥아내고 왔는데...이게 또 피자가 구워져 눈앞에 놓이니 미치겠더군요. "아유, 대표님 안드시나보다" 제가 다 처묵처묵 했습니다. 가히 일론 머스크의 맛이로구나!
로봇팔이 피자를 꺼낸다
겐신의 검이 빛난다!
피자가 구워지기 직전
그런데 임 대표님이 보기에는 제가 억지로 먹는 것처럼 보였나봐요. 마지막 남은 한조각을 음흉하게 탐하던 순간 "배 부르면 억지로 드시지 마세요"라며 포장지를 덮으셨습니다. 저를 생각해준 것이겠지요. 하지만 다음부터는..진짜 그러지 마세요. 먹는걸로 그러는거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상대방을 더 믿으세요.
한 외국인 가족이 고피자를 주문하고 있다
스냅의 미학
'냉동피자를 꺼내 자른 후 구워 제공한다' 일견 간단해보이지만 여기에는 수 많은 디테일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피자의 접근성. 임 대표는 2016년 여의도 밤도깨비 야시장 푸드트럭에서 장사를 하며 유통업계에 진입한 인물인데요. 그는 푸드트럭의 특성에서 착안해 맛있는 음식을 빠르게 제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피자를 빠르고, 효율적이고, 저렴하게 만드는 것. 반죽 시간을 줄이기 위해 파베이크 도우를 개발했고, 피자를 공고루 빨리 굽기 위해 전용 오븐 ‘고븐’을 제작한 이유입니다.
맛의 균일성을 지킬 수 있다는 뻔한 강점에서 나아가 고븐의 크기를 축소하고 전기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개선한 ‘고븐 미니’도 고심 끝에 나온 아이템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인건비가 줄어드는 것도 혁신의 한 사례에 들어가겠죠? 네. 임 대표님의 이번 야심작은 디테일하면서도 다양한 포석을 깔아둔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이런 전략은 당연히 다양한 상황에서 더 다양한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유리하지요.
다만 제 눈에 가장 매력적인 디테일은 스냅입니다. 스테이션에서 피자가 커팅되어 고븐 미니에서 구워진 뒤 박스에 담길때 그 진가를 볼 수 있는데요. 로봇팔이 나와 피자를 박스에 담는 후 갑자기 아래 기계가 '흔들'하더군요. 처음에는 오류인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흔들' 강도와 범위는 모두 철저히 계산된 알고리즘이라고 합니다. 왜? 노릇노릇한 피자의 특성상 박스에 담길때 100% 안착하는 것은 어렵거든요. 이럴때 바닥을 '흔들'해주면 피자가 '착'하고 박스에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자가 박스에 담기는 순간 '흔들'
임 대표는 "이 방식을 적용하려 수천번의 시도를 했다"면서 "완성된 피자가 박스에 낙하할 때 다소 범위에서 벗어나도, 순식간에 온전히 자리를 잡게 만들어 준다"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이 대목을 설명할 때 가장 뿌듯해 보이는건 착각이겠지요. 그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 주워먹다가 아 사진찍어야하는데 싶어 찍었다
아직도 고피자 푸드트럭은 달린다
임 대표는 초엘리트의 길을 걷다 푸드트럭 장사를 시작한 '기묘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을때면 직업 특성상 의심부터 합니다. '야심이 있어 스토리가 필요했나?' 뭐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임 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좀 의외였습니다.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돈이 필요했거든요"
있어보이는 말이 아닌데 왠지 있어보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분입니다...여튼 그렇게 임 대표는 돈을 구하기 위해 지방으로 간 수십만을 뛴 트럭을 구매한 후 무작정 푸드트럭을 시작했답니다. 처음에는 리어카로 장사를 하려고 했다는...하지만 그건 불법이었고, 결국 푸드트럭을 선택했어요.
꽤 오랫동안 장사를 했습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나아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분좋은 바람이 불어오던 날 푸드트럭 옆에 서서 한강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구나" 사실은 푸드트럭 시절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월 매출은 얼마였냐. 순이익은? 장사 스킬은?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가 됐거든요. 아주 가끔은 내가 선체로 바라보는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바로 지금이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으니까.
지금의 아내와는 그때부터 연애했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퇴근하면 푸드트럭으로 달려와 앞치마를 두르고 계산원으로 변신했다고. 임 대표님 진짜 결혼 잘하신겁니다. 잘하셔야해요. 저번 주말에 아드님과 노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뭐 그런말 하면 안되는 겁니다...!
여튼 그렇게 시드머니를 모은 임 대표님은 지금의 고피자를 만들었고, 인도 등 글로벌 진출을 이뤄냈고, 무엇보다 GS의 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성공의 나선에 바닥부터 다져온 노하우와 디테일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거의 매일 매장에 찾아와 상황을 점검하고 업그레이드를 추진하는 꾸준함은 디폴트. 여기에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을 낮추며 주변 이해 당사자들을 내거로 만드는 능력까지. 적절한 화려함과. 그 아래에 촘촘히 깔린 실전능력.
아. 여담이지만 GS와의 협업에 대해서는 이렇게 만하더군요. "사람들이 대기업은 관료집단처럼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다. 자신들의 여러 사업에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철저히 따지는 과정은 신중하지만 한번 결정나면 무서운 속도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인다" 요 멘트는 최근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장단점에 있어 유사 전문가들이 판치는데...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한번 적어봅니다.
자. 그렇게 고피자의 질주를 끌어낸 임 대표님은 GS25의 미래 체험형 매장 GS25 그라..뭐시기를 통해 새로운 실험에 또 나서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개인적으로, 또 직업 특성상으로도 흥미로운 대표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좋았습니다. 사실 많은 대표님들을 비공식적으로다가(?) 만나는 편이지만 대부분 들은 이야기는 당연히 기사로도 못쓰고, 이렇게 편안하게 쓰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저도 뭐 딱히 귀찮아서 기록하지는 않는 편인데 임 대표님 이야기는, 또 GS25의 미래 체험형 매장 GS25 그라..뭐시기 이야기는 한번 끄적여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났는데 지금의 임 대표님이 있도록 해준 푸드트럭은 지금도 현역이라고 합니다. 푸드트럭 장사를 할 당시 같은 장소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점주 두 분이 계셨는데..이 분들이 상황이 어려워지자 임 대표님이 고피자를 창업하자 찾아왔다고 해요. 임 대표님은 그분들에게 자신이 몰던 트럭을 주며 고피자 점주로 함께 활동하자고 했다 합니다. 지금도 서울 어딘가에, 고피자 푸드트럭이 보인다면 그 분들로 알면 됩니다. 사실 임 대표님과의 첫 인연은 좀 껄끄럽게 시작한 케이스인데...그래서 사실은 이 분이 어떤 사람인지 좀 알고싶은 마음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역시 임 대표님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키워드인것 같아 또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