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하고 발칙한 상상
애플이 아이폰7을 발표했습니다. 루머가 현실이 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어요. 이건 뭐 그렇다고요. 그랬습니다.
아이폰7도 나름 훌륭합니다. 다만 제가 더 흥미롭게 본 것은 에어팟입니다.(많은 사람들도 그렇더군요) 159달러짜리 무선 헤드폰 에어팟은 3.5mm 헤드폰잭을 밀어내며 나름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뭐랄까. 담배 한 가치를 귀에다 박은 것 같아요. 담뱃값 인상으로 고통받는 한국인 능멸하나요? 피고 싶은 담배 못피니 비슷한 거 귀에다 박고 정신승리나 하라는 건가요?(죄송합니다)
현 상황에서 에어팟에 대한 업계의 반응은 '이게뭐야!'로 압축됩니다. 제 이야기도 이런 당혹감에서 시작됩니다. 네, 시작합니다. 강조하지만 철저한 사견이고 헛소리이지만 과감하고 발칙한 상상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냥 상상입니다.
에어팟의 의미
애플은 왜 이런짓을 했을까요? 왜 에어팟을 통해 무선의 시대로 우리를 안내하려고 할까요. 도대체 왜? 일단 시장의 분위기에서 보여진 현실적 이유입니다. 올해 상반기 미국 시장에서 팔린 이어폰을 조사한 결과 블루투스 기반이 54%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선에서 무선으로 승부를 던질 개연성이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애플은 이 지점에서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유선은 무선보다 음질이 좋아요. 그리고 에어팟이 아무리 비싸도 엄청난 가격의 유선 이어폰 헤드셋에 비해서는 분명 기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수백만원의 기기를 구입하며 고품질의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 음악을 스마트폰에서 듣고싶어 할까요? 뭐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B&O와의 협력을 통해 음원에 집중하는 LG전자의 V20이 상당히 개인적으로는 걱정이지만...뭐 이건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알아두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스마트폰에서 완전한, 수백만원 상당의 프리미엄 음원을 즐기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전제로 보면 에어팟은 나름 효과적인 승부수입니다. '수백, 수천만원 프리미엄 음원은 따로 스피커 사서 들으셈, 대신 편리하게 무선 이어폰을 스마트폰에서 사용하고 싶은 사람들은 에어팟 쓰셈'
3.5mm 단자의 존재감도 시선을 끕니다. 최근 스마트폰 대세는 슬림한 디자인을 추구하면서 깔끔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3.5mm 단자는 외부에서 보기에 별로 커보이지 않아도 내부에는 의외로 넓은 실장면적을 가집니다. 내부의 다양한 기기들을 더욱 '좁혀서' 배치하는 상황에서 3.5mm 단자가 사라지면 나름 얻는 것이 있을 겁니다. 혁신의 애플 아닙니까. 줄일 수 있으면 줄여서 뭔가 다른 쪽으로 고민하려고 했겠죠.
사용자 경험적 측면에서도 강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페어링과 같은 복잡한 프로세스가 대폭 감축되고 인공지능 시리와 연동됩니다. 스마트폰과 애플워치와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도 가능합니다.
자, 여기까지입니다. 애플이 왜 에어팟을 출시했는가.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납득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무선 이어폰이 뜨고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다고 해도 갑자기 20만원이 넘는 무선 이어폰을 돈 주고 사라고 한다니. 이건 폭력입니다. 테크크런치의 표현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행위에요. 왜? 아무리 아이폰 판매량이 떨어지고 있다고 해도 아직 아이폰은 단일 스마트폰 중 가장 많이 팔리는 기기입니다. 아이폰이 곧 플랫폼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애플은 에어팟을 출시하며 '나의 충성 고객들이여, 어차피 아이폰7 쓸 사람들이여. 20만원 들여서 에어팟을 쓰거라'고 강매하는 꼴입니다.
에어팟이 폭력이라는 주장은 자체 설계 W1 칩셋을 탑재한 점을 두고도 증명됩니다. 블루투스를 외면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WWDC 2016에서 SDK 대방출하며 오픈생태계 기세를 올리더니 중요한 에어팟에서 또 폐쇄적 생태계로 흐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겠죠. "우리가 최고니까"
그러면서도 아직은 과도기적 분위기도 연출합니다. 라이트닝 커넥터 이어팟을 연결하면 기존 3.5mm 이어폰도 연동이 되거든요. 충전하며 음악을 듣는 호사는 포기해야 합니다만, 어쨋든 이건 애플도 아직 전격적인 에어팟 체제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핵심적인 증거입니다. "내 말 들어!"라면서도 "...혹시 모르니 시간은 줄께. 따. 딱히 이어폰 문제로 고민하는 너희들 생각해서는 아니야"라고 츤츤데는것 같아요. 참고로 3.5mm 이어폰을 쓸때 사용되는 어댑터는 무료랍니다.
그러면서 디자인은 왜 이런지...진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시다
여기서 에어팟에 숨은 나름의 의도를 상상해보겠습니다. 이건 상상입니다. 너무 황당해서 이런 상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울증이 올 것 같아요...보겠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애플이 에어팟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에 집중해봅시다. 정말 애플이 무선 이어폰이 뜨고있는 현실적 이슈들에 집중해, 혹은 돈을 더 벌려고 에어팟을 출시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웨어러블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어팟은 말 그대로 아이폰과 바로 연동이 되며 음성 감지 가속도계의 빔포잉 마이크 등 나름의 사용자 경험을 추구합니다. 데이터를 다양한 기기와 자유롭게 오가게 만들 수 있어요.
에어팟을 단순한 이어폰이 아닌 웨어러블로 본다면 자연스럽게 플랫폼적 활용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포스트 스마트폰을 넘어서는 새로운 플랫폼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성공 가능성을 올릴 수 있을까요? 열라 훌륭하면 되겠지만 현재의 강자인 스마트폰의 후광효과를 노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에어팟은 여기에 들어 맞습니다. 기존 스마트폰인 아이폰과 스마트워치인 애플워치와 적절히 연동되며 자연스럽게 일정정도의 콘텐츠 유통 권력을 체화시킬 수 있어요. 에어팟이 데이터를 주고 받는다는 점이 의미심장한 이유입니다. 당연하지만, 시리가 엮인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플랫폼 설계 자체는 대단히 폐쇄적이지만(블루투스까지 포기할 줄은...) 에어팟이 모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과도 연동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리는 지원이 되지 않겠지만 에어팟은 그 자체로 이종 생태계에 한 발 담글 수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플랫폼 범용성 측면에서 어떻게든 다양한 경우의 수가 가능해집니다.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네, 물론 이러한 상상은 "애플이 20만원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리스크를 감내하며 이 미친 무선 이어폰을 강매할 이유가 없어'에서 시작됩니다. 자연스럽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전개된 상상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애플입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면 이용자들의 원성따위는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마이웨이를 가는 미친놈들입니다. 이 관점에서 에어팟을 웨어러블, 나아가 이동하는 초연결 플랫폼으로 염두에 뒀다면? 이라는 신선한 개소리를 한 번 남겨봅니다. 제가 심심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뭔가 이상해서....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