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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Apr 09. 2024

윌리엄 오펜-런던 거리의 창문

언제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윌리엄 오펜(William Orpen), 런던 거리의 창문(A Window in London Street), 1901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

창은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규정하는 틀이 된다. 하루아침에 천지가 개벽하는 예외적인 상황도 있지만 대개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내 눈앞의 창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따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네모난 창을 통해 밖을 보는 사람은 네모난 세상을 꿈꾸고 동그란 창 너머로 밖을 보는 사람은 동그란 세상을 눈에 담는다. 높고 넓은 창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에게 세상은 봄볕을 쬐며 바람을 따라 쏟아져 내리는 꽃비에 하루의 기분을 온전히 맡기기에 딱 좋은 그런 곳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범용 쇠창살이 세로로 죽죽 내리꽂힌 작은 창을 커튼으로 덮은 채 살아가는 소시민이나 세금 폭탄을 피하고자 창문을 막고 줄여야 했던 서민들에게 그 너머의 세상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외출 채비라도 한 듯 밤하늘을 닮은 프러시안 블루 드레스를 걸치고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목걸이를 목에 두른 여자가 창문 앞에 서 있다. 폭이 좁고 높이가 낮은 창을 사방으로 에워싼 창틀은 창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제한하는 가림막이 되고 방범용 쇠창살은 눈앞의 세상을 여러 조각으로 등분하는 칼날이 된다. 하지만, 웬만한 방의 벽면을 통째로 뒤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창 앞에 선 여자의 시선은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다.      


커다란 창 너머로 여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어서 밖으로 나가 템스강변을 거닐고 큰 배가 지나갈 때마다 반으로 갈라지는 타워브리지의 신묘한 재주를 보고 싶을 뿐이다. 세상을 향한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바깥세상을 탐색하던 여자는 맞은편 건물의 앙증맞은 창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뜨겁게 달아오른 한낮의 태양을 있는 그대로 투과시켜 실내 공기를 불쾌할 정도로 후텁지근하게 달구는 거대한 창 대신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적당히 자르고 뭉개 반쯤만 실내로 들이는 작은 창이 살기에는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바라보는 세상

큰 창이 있는 집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큰 창문 집 여자’로 불렸을 거다. 거리낄 것 없이 밖을 바라볼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창문이 작은 집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폭이 좁고 길쭉한 창이 난 집에 세 들어 사는 도시 주민들은 작으나마 창문을 여닫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며 살았을 테다.      


1696년,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창문세라는 기발한 세목을 도입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고가의 건축 재료였던 유리를 이용한 창문이 많이 달린 집일수록 부잣집일 가능성이 크니 돈이 많은 부자에게 세금을 거둬 나라 재정을 다지겠다는 발상은 제법 합리적인 것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여 사는 도시의 임대 주택에 개별 가구의 창문 수가 아닌 건물 전체의 창문 숫자를 제한하는 법이 적용되자 그러잖아도 돈이 없고 힘든 사람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 창문세를 내느라 지출이 늘어난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좀 더 많은 임차료를 요구했고 가난한 도시 주민들은 세금을 피하려고 벽돌로 창문을 막았다. 창문이 막혀 환기와 채광이 힘들어지자 가난한 도시 빈민들의 건강 상태가 더욱 나빠졌고 콜레라, 천연두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다. 무려 150여 년이나 유지됐던 창문세는 국민 건강 문제를 지속해서 제기한 지식인들의 노력 덕에 1851년이 돼서야 폐지됐다.


창문세를 피하려고 창문을 벽돌로 막아놓은 집. 사진가 앤디 빌먼(Andy Billman)이 런던에서 찍은 사진.

거기에 사람 있어요

조금만 생각하면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집안에도 사람이 있고 창문 밖에도 사람이 있다. 건물에 뚫어놓은 창문에 세금을 매기면 나라 살림살이가 좀 나아질 수도 있지만, 세금이라는 것은 무릇 내는 사람이 있어야 걷히는 법이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의 곤궁한 살림살이가 어떤 것인지 가늠도 못 하는 지체 높으신 분들은 은찻잔에 담긴 홍차에 서민들은 꿈도 못 꿀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며 창문세 부과가 비어가는 국고를 다시 채울 기발한 방법이라고 환호했을 것이다. 창문세 부과가 국민 건강 악화로 이어져 더욱 심각한 재정 낭비를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했더라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창문세를 도입한 사람들과 창문세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꿋꿋하게 묵살한 사람들이 함께 간과한 것은 언제나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다.      


내가 얻을 게 무엇이고 잃을 게 무엇이건 언제나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좀 더 인간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 비쉬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전쟁 포로가 된 남편을 기다리는 프랑스 여인 루실과 비쉬를 점령한 독일군 장교 브루노의 절절한 사랑과 그들이 마주한 현실의 무게를 담은 영화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caise)>.      


서로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선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차치하고, 영화에는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고된 삶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부와 안녕을 챙기기에 급급한 두 여인이 등장한다. 그중 첫 번째인 루실의 시어머니는 계속된 전쟁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이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곤궁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작농들에게 악착같이 돈을 받아낸다. 마지못해 그녀에게 돈을 건네는 소작농들의 눈빛은 경멸로 그득하다. 그 두 번째인 시장 부인은 호화로운 창 뒤에 서서 타인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릴 불행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자신의 불편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똑같이 화려한 저택에서 머물며 한때는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독일군의 등장으로 위험천만한 곳이 되어버린 창밖 세상을 경계하며 살던 두 여인은 서로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사람들의 비난 가득한 눈빛에도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가졌던 루실의 시어머니는 독일군 장교를 살해한 후 집에 숨어든 가난한 이웃 브누아에게서 전쟁 포로로 잡힌 아들의 향기를 느낀다. 반면, 시장 부인은 굶주린 가족의 입에 넣어줄 음식을 구하기 위해 식량 저장고에 숨어든 브누아가 자신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자 비쉬의 시장인 남편에게 브누아의 죄를 과장해서 고발하며 즉시 체포해 달라고 요구한다.      


창문 안쪽 세상을 공고히 지켜내는 것을 지상최대의 과제로 삼았던 두 여인은 브누아라는 동일 인물에게 각자 다른 태도를 보인다. 도망자의 행색 뒤에 가려진 사람을 보았던 루실의 시어머니는 기꺼이 브누아의 도주를 돕고, 파리로 달아난 브누아는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독립투사가 된다. 하지만,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다리를 끌고 식량을 훔치러 온 브누아의 분노 섞인 호소를 듣고도 마을 사람들의 고난과 굶주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시장 부인의 어리석음은 결국 남편을 겨누는 총알이 된다. 조금 늦었지만 항상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루실의 시어머니는 독립투사를 만들어냈고 끝내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시장 부인은 남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사람도,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는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윌리엄 오펜-런던 거리의 창문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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