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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Nov 21. 2024

욕망이 흐르는 미술관

욕망: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라 넘실대는 상태

런던 관광객들(London Visitors),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74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가 영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그린 그림. 런던 내셔널 갤러리를 관람하고 나온 관광객들을 표현했다. 


뮤지엄 산

미술관은 욕망이 은밀하게 떠다니는 곳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을 끌어안고 미술관을 찾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사한 작품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미술관을 찾는다. 물론 얼떨결에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미술관을 찾는 사람도 있을 테고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가까운 미술관을 찾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래도 별생각 없이 미술관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한테서도 어떤 식으로든 욕망의 흔적이 조금은 엿보인다. 가령, 미술관으로 끌고 들어간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든가 애매하게 남은 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내고 싶다든가 하는 욕망 말이다.      


뮤지엄 산(SAN, Space, Art, Nature)을 방문한 사람들은 아마도 좀 더 선명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문막 나들목이든 서원주 나들목이든 가까운 나들목에서 10분은 달려야 하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미술관 뮤지엄 산. 원주의 어느 산자락에 위치해서 뮤지엄 ‘산’이기도 하지만 공간(space)과 예술(art), 자연(nature)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다는 의미에서 ‘산(SAN)’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을 둘러싼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을 뿐 아니라 미술관 건물 자체가 유달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드라마나 광고 배경으로, 추천 데이트 장소로, 가족 여행 명소로 종종 언급되는 뮤지엄 산을 어떤 티끌만 한 욕망도 없이 찾는 사람은 없을 거다.      


아치웨이(Archway),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eberman)


내게 손짓하는 욕망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는 어떤 욕망에 이끌려 뮤지엄 산을 찾아간 걸까? 아름다운 예술을 감상하고 싶다는 숭고한 욕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이따금 내 마음을 들쑤시는 일탈 본능이 끓어올랐다. 매일 눈을 뜨면 24시간이 새롭게 생겨나는데 막상 내 손에 쥐어지는 시간은 전혀 없는 것 같은 허탈한 기분이 싫었다. 언제나 붙박이 가구처럼 집안에서 한 자리 턱 차지하고 앉아 있다가 식구들이 집에 들어오면 반갑게 몇 마디 나눈 다음 다시 가구가 돼버리는 역할을 내려놓고 싶었다. 단 하루 어디론가 달려 나간다고 해서 다음 날의 일상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단 하루조차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삶은 싫었다.      


길이 막혀도 원주까지는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어차피 미술관은 10시에 문을 여니 아이의 소풍 김밥을 싸는 시간을 생각하더라도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김밥 몇 줄 싸는 것쯤이야 굳이 소풍날이 아니어도 종종 하던 일이니 딱히 염려도 하지 않았다.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재료를 준비하고는 밥솥을 열었다. 윤기가 좌르르 흘러야 할 쌀알은 찰기라고는 전혀 없는 동남아 쌀처럼 밥솥 안을 굴러다녔다. 간신히 밥알을 꾹꾹 눌러 자꾸만 터지는 김밥을 억지로 이어붙였다. 엉망이 된 김밥을 조심스레 썰어 입에 넣어보니 밥알이 절반만 익은 듯 퍼석퍼석했다.      


도대체 날이면 날마다 하는 밥이 왜 이 정도로 엉망이 돼버린 건지 너무도 궁금했다. 손으로는 김밥을 싸며 머리로는 답을 찾았다. 분주하게 답을 찾는 내 눈에 그릇 건조대 위에 얌전하게 놓인 압력밥솥 고무 패킹이 걸려들었다. 아뿔싸! 과도한 설렘이 문제였다. 붙박이 가구 신세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멀어 붙박이 가구의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 꼭 엄마만 김밥을 싸야 하는가?’, ‘소풍 도시락 싸기가 꼭 엄마의 몫인가?’, ‘평생 도시락 김밥 한 줄 안 싸본 아빠에게는 잘못이 없는가?’ 같은 논쟁은 미뤄두자!)      


시간의 밀도

김밥 완성 시간이 늦춰졌고, 결국 출발 시간도 미뤄졌다. 출발이 늦어진 만큼 뮤지엄 산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아쉬움을 줄이려면 시간의 밀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언제든 여행을 떠나면 시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높아진다. 하루는 언제나 24시간이지만 여행길에서 보내는 하루는 평소의 몇 배쯤 촘촘해지는 기분이다.      


뮤지엄 산은 듣던 대로 황홀했다. 뮤지엄 산을 에워싼 숲은 갖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딱 이맘때 절정에 달하는 강원도의 단풍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극적인 대비를 이뤘다. 조각 공원을 지나 워터가든에 들어서자 붉은빛을 띤 12개의 육중한 파이프를 연결한 <아치웨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치웨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거대한 붉은색 펜네를 조심스레 쌓아둔 것 같기도 했고 빨간 매니큐어를 칠해놓은 손톱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자칫 날카로워 보일 수도 있는 뾰족한 조각들은 <아치웨이>의 이름으로 하나가 돼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을 너른 품으로 품어주었다.      


뮤지엄 산의 압권은 단연 미술관 건물 그 자체였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현대적인 노출 콘크리트 건물에는 단순한 선의 강렬함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콘크리트 벽 아래로 길게 뻗은 투명한 전면 유리와 유리창 너머로 일렁이는 물결, 차가운 콘크리트 노출 벽면과 따뜻한 파주석 벽면의 오묘한 조화. 자연과 빛을 최대한 활용하는 공간 구조. 그 넓은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어떤 작품을 어떻게 전시해도 안도 다다오의 공간은 작품 전시를 위한 뒷배경으로 밀려날 것 같지 않았다. 그 벽에 어떤 그림이 걸리든 그 공간 안에 어떤 작품이 설치되든 안도 다다오의 공간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예술품이 되어 다른 작품과 함께 빛날 것이 틀림없었다. 붙박이 가구 같은 신세가 싫어서 떠난 뮤지엄 산에서 어쩌면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저만의 빛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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