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를 네가 알렸다!
피고인, 아니 피고 달팽이 양갱씨.
당신은 왜 친구를 먹어 치웠나요?
왜 따뜻한 마음으로 당신을 한 달간 보살펴주기로 한 H군의 반려 달팽이를 먹어 치운 건가요?
당신의 죄를 아시나요?
새로운 반려동물, 양갱
우리집은 그리 동물 친화적인 곳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물이란, 곤충을 포함할 정도로 사전적 분류를 충실히 따르긴 하지만, 인간은 포함하지 않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집은, 좋게 말하면 인간 친화적인 곳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오직 인간의 편의를 위하는 데 충실할 뿐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 큰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다. 그런 우리집에도 가끔 반려동물이 등장한다. 토론토에서는 커다란 어항에 물고기를 키웠고, 세종에서는 장수풍뎅이를 키웠다. 먹이만 미리 잔뜩 챙겨 놓고 가면 멀리 여행을 가도, 며칠쯤은 혼자 둬도 되는 그런 동물들만이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우리집에 입주할 자격을 얻었다.
지난 12월, 우리집에 새로운 반려동물이 입주했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그 반려동물에게 딸은 ‘양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동안 즐겨 부르던 비비의 ‘밤양갱’에서 따온 이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달팽이를 보고 양갱을 떠올리는 딸아이의 감성이 귀여웠다. 단단한 껍질 속에 쌓인 연체동물 특유의 흐느적거림이 양갱이라는 이름과 찰떡같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실, 딸이 친구한테 얻어온 달팽이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학교에서 전화를 걸어와 “엄마, 친구가 달팽이 나눠준다는데 한 마리만 키워도 돼?”라는 딸의 질문을 듣고 내가 떠올린 달팽이는 새끼손톱만큼 몸집이 작은 토종 달팽이였다. 그러나 내 눈앞에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건 토종 달팽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집이 큰 거대 달팽이였다. 딸 친구는 우리집에 입주한 달팽이가 프랑스 달팽이 요리인 에스카르고의 재료가 되는 바로 그 달팽이라고 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양갱은 느닷없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애처로운 존재가 됐다.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엄마, 얘 키워서 잡아먹을 건 아니지?” 우리 가족이 양갱을 잘 키워 잡아먹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 길러져 결국 인간에게 잡아먹히고 말 운명을 타고난 슬픈 친구들을 둔 양갱이 왠지 안쓰러웠다.
사건의 발단
근거 없는 애처로움을 가슴에 품고 양갱을 위한 집과 먹이를 준비했다. 달팽이는 이미 집을 짊어지고 사는데, 굳이 인간이 사는 집에다 데려다 놓고, 그 안에서 달팽이만을 위한 또 하나의 집을 만들어두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도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가루 먹이에 물을 섞어 주거나 양상추나 상추를 듬성듬성 큰 조각으로 잘라주면 맛있게도 먹었다. 가느다랗게 썰어둔 당근채를 넣어주면 두 팔로 보물을 끌어안듯 뿔처럼 생긴 기다란 더듬이로 당근을 움켜쥐었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당근을 먹는 양갱을 보며 이 맛에 반려동물을 키우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넷은 오가며 자연스럽게 양갱의 안부를 살폈다. 당근과 양상추 중에서 뭘 더 좋아하는지, 물이 다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하루 동안 모래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은 건지, 마치 어린아이를 살피듯 양갱을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우기 전에 동생집에 양갱을 맡겼다. 그 집에는 우리 땅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달팽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화단에 있는 알을 주워 집으로 데리고 온 다음 부화시켜 1년 동안 기른 달팽이라고 했다. 일 년쯤 된다는 달팽이의 평균 수명을 거의 다 채운 동생네 꼬마 달팽이는 유독 기운이 없다고 했다. 그런 꼬마 달팽이한테 활력을 불어넣는 친구가 돼줄지도 모른다며 동생은 흔쾌히 양갱을 맡아주었다. 양갱을 데려다주러 들른 동생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는 일곱 살 난 조카가 스케치북에 적어둔 커다란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조카는 산타에게 줄 편지에 꼬마 달팽이가 죽지 않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담아 두었다.
양갱을 맡기고 돌아온 다음 날, 동생은 커다란 배춧잎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꼬마 달팽이와 양갱을 나란히 올려놓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온했다. 그들의 평화로운 동거가 계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틀 후 동생이 몹시 속상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왔더니 꼬마 달팽이는 등껍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양갱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깊숙이 들여다봐도 꼬마 달팽이의 몸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고 했다. 일 년짜리 소원을 가뿐히 바칠 만큼 달팽이를 사랑했던 조카에게 양갱의 만행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여행지에서 흥에 겨워 저녁을 먹던 중 동생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못내 무거워졌다. 전화기 너머로 내 목소리를 들은 조카는 서럽게 울며 복수를 다짐했다. 교육적인 측면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복수는 안 된다고 해야 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꼬마 달팽이의 장수를 바랐던 조카의 마음을 알기에 복수가 나쁘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양갱은 원래 한 달간 동생 집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보니 동생은 도저히 속상해서 더 이상 양갱을 볼 자신이 없다며 귀국하는 대로 양갱을 데려가라고 재촉했다.
달팽이 재판
꼬마 달팽이를 잡아먹고 다시 작은 플라스틱 집에 갇힌 양갱은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후부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생 말마따나 ‘골뱅이를 파먹듯’ 친구를 먹어 치운 양갱을 태연한 얼굴로 키울 자신이 없었다. 양갱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 고민이 시작됐다. 내심 조카가 호언장담한 대로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감행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곱 살짜리 조카의 복수심 뒤에 숨어 복잡한 내 마음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카는 끓어오르는 복수의 감정을 잘 다스렸다.
그렇다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방법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맨 처음 딸은 절대로 돌려주고 싶지 않다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니 사촌 동생의 마음이 얼마간 이해가 간다며 친구에게 한번 물어보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양갱의 원래 주인은 단호했다. 처음부터 분명하게 얘기했다며, ‘반품 불가’만 외쳐댔다.
머리가 너무도 복잡했다. 딱히 방법은 없었지만 집에 놀러 온 조카가 양갱을 보고 마음 아파할 모습을 상상하면 양갱을 그냥 집에 두는 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한동안 우리 가족의 애정 어린 눈길을 독차지했던 양갱은 천덕꾸러기가 됐다. 다들 눈을 흘기며 양갱을 힐끗힐끗 쳐다볼 뿐이었고, 오가며 인사를 건네는 일도 없어졌다.
다 같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편이 판결을 내렸다.
남편의 판결은 이랬다.
- 먼저, 우리는 처음부터 양갱이 살 집을 따로 주었으니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 동생은 양갱이 육식인 걸 몰랐기에 두 달팽이를 함께 둔 것이니 전혀 죄가 없다.
- 딸은 그야말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 양갱을 빼앗기는 벌을 받을 이유가 없다.
- 마지막으로, 양갱은 동물의 본능에 따라 눈앞의 먹이를 먹어 치운 것뿐이니 죄가 없다.
요약하면, 너무도 슬픈 일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에게도 죄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달팽이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재판은 끝났지만 양갱을 보는 내 마음은 여전히 조금은 불편하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해 보면 죄를 지은 건 양갱이 아니라 나다. 양갱이 아프리카 왕달팽이며 아프리카 왕달팽이는 육식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원래 주인이었던 아이의 말만 듣고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무지가 곧 죄였다. 무엇이 사건의 원인이었는지 제대로 따지고 보니 SF 영화 속 에일리언을 닮은 것 같아 가까이 가기도 싫었던 양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를 집에 들이는 일은 참 어렵다. 집 한구석을 나눠주고, 그리하여 마음을 나눠주는 게 어려운 일인 걸 알아서 고양이나 강아지는 쉽게 들이지 못하면서 유독 달팽이만 너무도 가벼운 마음으로, 일말의 고민이나 책임감도 없이 간단하게 집에 들인 게 나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 그저 아이의 호기심을 채워 주고 싶다는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집에 들여서는 안 됐다. 양갱을 집에 들인 다음에도 나의 실수는 계속됐다. 일단 내 집의 한 귀퉁이를 내어준 생명체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누구인지, 어떤 식성을 가졌는지, 적어도 그쯤은 열심히 알아봤어야 한다. 아무에게나 마음을 내어줘서는 안 되지만, 일단 마음을 줬다면 제대로 깊이 있는 관심을 기울였어야 마땅하다. 집이든, 마음이든 나의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나눠줄 때는 순간의 감상보다는 좀 더 깊은 진심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