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세계

'대박'이 삼킨 말들

by 김현정

대박을 부르는 풍경

세상에는 확신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마음이 변하기도 하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감히 자신 있게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록키산맥 앞에 선 사람은 누구나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록키산맥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유키 구라모토가 연주하는 레이크 루이스의 황홀한 선율과 미디어를 통해서 보았던 레이크 루이스의 청아하면서도 압도적인 풍경에 매료되긴 했지만 록키산맥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하지만 캘거리를 벗어나 밴프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저 멀리 장엄하게 늘어선 록키산맥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밴프의 레이크 루이스와 모레인 호수, 밴프와 재스퍼를 잇는 도로를 둘러싼 절경, 눈으로 덮인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빙하 호수 보우 레이크, 밤이 늦도록 환한 재스퍼 다운타운의 백야, 캐나다 관광 홍보 포스터에나 나올 법한 멀린 호수의 몽환적인 경치.


록키산맥은 다채로운 풍경을 품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빙하,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호수, 녹아내린 만년설과 석회가루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에메랄드빛, 하늘 높이 길고 곧게 쭉쭉 뻗어나간 침엽수 군락, 에메랄드빛 호수와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 카누, 저 높이 만년설이 뒤덮인 산봉우리, 눈에 보이는 머리 위 텅 빈 공간이 우주와 맞닿아 있음이 실감 날 정도로 투명하고 광활해 보이는 하늘, 지나가는 차는 아랑곳없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사슴과 곰.


그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인 풍경을 보며 내가 쏟아낸 많은 감탄사 중 단연코 1위를 차지한 것은 '대박'이었다. 그렇게 내 말주머니 속에 든 수많은 감탄사를 모두 집어삼킨 '대박'은 '어떤 일이 크게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이렇듯 '대박'은 그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대박'의 진정한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다재다능함과 효율성에 있다. '대박 맛집', '그건 대박이야', '대박!' '대박 멋진데?!' 같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무쌍하게 변신할 수 있는 '대박'의 다재다능함, 실용성이 중요시되는 트렌드에 어울리게 '저 앞에 펼쳐진 록키산맥이 말도 못 하게 아름다운 걸!'이라는 긴 문장을 짧은 두 글자에 담아낼 수 있는 효율성. 이렇게 매력이 넘쳐나니 많은 사람들의 언어생활을 사로잡은 대박의 인기는 한동안 수그러들지 않을 듯하다.


우리에게 허락된 표현이 대박뿐일까?

그렇다. '대박'의 매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대박'과 그 자매품 '미쳤어'와 '짜증 나'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 가능한 단 하나의 단어를 지나치게 다양한 맥락에 구겨 넣다 보니 얼마든지 좀 더 다채로운 표현을 적용할 수 있는 맥락에서도 더 이상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돼 언어 표현 자체가 제한된다. 어디 그뿐인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대박'이라는 한 마디로 온갖 감정을 담아낼 수 있으니 그보다 효율적인 표현이 없겠지만 듣는 사람은 도대체 왜 '대박'인지 말하는 사람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과제가 돼버린다. 결국 말하는 사람의 언어 효율성은 높아지지만 듣는 사람의 언어 효율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것도 '대박', 새로운 것도 '대박', '마음에 쏙 드는 것도 '대박'이 돼버리니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박'이 무엇에 대한 감탄인지 알 길이 없다.


치명적인 매력과 파괴적인 영향력으로 우리의 언어생활을 장악해 버린 '대박'과 '미쳤어'와 '짜증 나'. 이토록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슈퍼 단어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단어들이 살아남아 재기 발랄하게 우리의 언어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다만 그와 동시에 이런 슈퍼 단어들에 얽매이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좀 더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붙잡아 제자리를 찾아주려고 노력하면 우리의 언어도, 그와 더불어 우리의 삶도 좀 더 풍요로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