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받지 못하는 '어머니'

누군가의 어머니이신 '어머니'

by 김현정

낮에는 사당에서 죽은 남편을 위해 기도하며 조신한 수절과부의 삶을 살다가 밤이 되면 담을 넘어 굶주리고 고통받는 백성을 돕는 여화와 이런 시절 가족이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고 살아남은 종사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밤에 피는 꽃'이 끝났다. 수절과부 여화는 시아버지의 계략에 빠져 혼롓날 남편이 죽은 줄로만 알고 얼굴도 보지 못한 남편을 위해 오랜 세월 수절하며 살았다. 하지만 드라마가 종방을 향해 달려갈 무렵 죽은 줄만 알았던 여화의 남편은 눈치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화를 짝사랑하던 종사관은 혹시나 하던 기대마저 사라져 버리자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신 후 드러눕고, 우연히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여화를 보며 술에 취한 채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 "부인, 누군가의 부인이신 부인~."


'부인'이라는 호칭에는 크게 두 가지 용법이 있다. 먼저, 누군가의 부인을 가리켜 '부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기 부인을 '부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드라마 속 종사관이 사용하는 '부인'이라는 호칭은 전자에 해당한다.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부인'이라는 호칭 역시 전자의 용례에 관한 것이다.


드라마 속 종사관은 여화를 직접 부를 때도, 여화를 가리켜 누군가에게 말할 때도 '부인'이라고 칭한다. 호칭이든 지칭이든 부인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뒷받침돼야 한다. 결혼을 통해 누군가의 아내가 돼야 한다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사람은 부인이라고 불릴 수 없다.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남녀가 유별해 무릇 가족이 아닌 남자와 여자는 서로 내외하는 사이여야 마땅했던 조선이었던 만큼 종사관이 여화를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했다. 여자는 남자가 보호하고 거느려야 할 존재로 여겨졌을 뿐 남자와 동등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였으니 그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별도의 호칭 없이 결혼한 '(누군가의) 부인'으로 불리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드라마 설정상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상대를 부르는 남자 주인공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부인'이라는 호칭에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부인'이라는 단어는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양반들이 자신의 부인을 부를 때 사용한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남자 주인공은 좋아하는 사람을 '부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녀가 '자신의 부인'이 아닌 '타인의 부인'임을 되뇌고 또 되새길 수밖에 없었을 테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적었지만, 드라마 속 종사관은 '내가 그녀를 부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녀는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사람임이 더욱 분명해진다'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부인'이라는 호칭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건 여화가 본 적도 없고 이미 1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았던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사실이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해서가 아니었다. '부인'이라는 호칭이 불편한 것은 두 사람의 직접적인 관계는 배제된 채 제삼자를 매개로 한 간접적인 관계만 이 호칭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칭은 곧 관계다.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의 관계가 호칭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항상 여자 주인공을 '부인'이라고 부른다. 여자 주인공을 묘사하는 이 '부인'이라는 단어 앞에는 생략된 말이 있다. '좌상댁 큰아들'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좌상댁 큰아들의 부인'이 이 여자 주인공을 부르는 호칭인 셈이다. 결국, '부인'이라는 호칭에는 두 주인공 간의 관계가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의 정체성 역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사실 역시 여자 주인공이 가진 정체성의 일부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갖는 부수적인 정체성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아줌마'에서 '아주머니'를 거쳐 자녀가 있을 법한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널리 사용되는 '어머니'. '어머니'라는 호칭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가 많은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비하와 멸시의 뉘앙스가 들러붙어 사람들의 반감을 샀던 호칭 '아줌마'와 달리 '어머니'라는 호칭에는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어머니'라는 호칭을 불편하게 여기는 여성들의 성토로 가득하다.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불러서 불쾌하다는 누군가의 불만에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한다. "그 사람이 당신보다 어려서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아니잖아요. 당신이 자녀가 있을 법한 나이니까 그 아이의 어머니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거죠. 괜한 자격지심이시네요. 프로 불편러이시거나요." 양쪽 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부르는 사람은 불리는 사람이 자녀가 있을 법한 연령대라고 판단해 '아무개의 어머니'를 줄여서 '어머니'라고 부른 것일 테고 불리는 사람은 딱 봐도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당하니 불쾌할 수밖에. 자녀가 있는 여성들도 '어머니'라는 호칭에 불쾌함을 느끼는데 미혼이나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사회가 정한 결혼 적령기를 넘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있지도 않은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따뜻해야 마땅할 '어머니'라는 호칭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질까?


'어머니'라는 호칭을 둘러싼 논쟁에서 좀 더 큰 관심을 두어야 할 쟁점은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 중 누가 나이가 더 많은가'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호칭에 어떤 관계가 반영돼 있는가'다. 자녀를 둔 여성이 그 자녀의 어머니 자격으로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을 만난다면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선생님과 그녀의 관계는 아이라는 존재를 매개로 한 간접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학부모를 부를 때도 '아무개의 어머니'보다는 학부모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는 서양식 호칭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어떤 여성이 자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실제로 그 연령대에 해당할지, 그녀에게 실제로 자녀가 있을지 그 어떤 정보도 없이 그녀의 호칭을 '어머니'로 퉁치면 부르는 이의 효율성은 높아지겠지만 호칭에 담긴 관계나 정체성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난다.


'누군가의 어머니이신 어머니'보다야 설혹 '어머니'보다는 조금 덜 숭고하고 덜 고귀한 호칭이더라도 불리는 사람의 참된 정체성과 관계의 진정성이 반영된 그런 호칭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