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어는 배려였을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늦은 밤, 운전대를 붙들고 장거리를 뛸 생각을 하니 그러잖아도 어지러운 머릿속이 더욱 복잡하게 엉켰다. 카페인이라도 쏟아부어야 눈이라도 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간신히 찾은 주차장에 황급히 차를 세워두고 애타게 커피가게를 찾던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파리바게뜨였다. 이왕이면 좀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그 순간의 카페인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기에 무심코 올라오는 불평 섞인 마음을 꾸역꾸역 밀어 누르고 파리바게뜨의 문을 열었다. 가게 문손잡이에는 짙은 회갈색 털의 맹견이 한 마리 묶여 있었다. 온순함과는 거리가 먼 얼굴을 한 개는 입에 테니스공을 하나 문 채 멀뚱멀뚱 세상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표정은 순하지만 본성이 사납기로 소문난 견종이 눈앞에 보이면 슬쩍 뒷걸음질을 쳐서 자리를 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서 커피를 사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강렬해서였는지 목줄에 묶인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개가 왠지 측은하게 느껴져 한번 씩 웃어주고는 가게 문을 열었다. 정말 카페인이 절실했던 밤이었지만 어쩌면 맹견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온순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눈빛에서 공격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나 역시도 움츠러들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어서 라테 한 잔을 들고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이미 나보다 먼저 매장을 찾은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계산대에 빵을 주르륵 올려놓는 키 큰 외국인과 캄캄한 밤인데 저러고도 앞이 보일까 싶을 정도로 시커먼 선글라스를 쓴 채 하염없이 핸드폰을 보는 한국 아저씨가 바로 그들이었다.
마음은 급한데 몸은 가만히 서 있어야 하니 몸과 마음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머리가 혼자 분주하게 돌아가는 건지 짧은 순간 동안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아우, 2분만 더 일찍 들어올걸. 그랬으면 내가 먼저 주문할 수 있었을걸. 저 빵을 언제 다 계산해?'라는 탄식이 떠올랐다. 그래봐야 몇 분 차이라고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독이고는 적당히 붉게 상기된 남자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저 양반 어디 가서 술 한잔하고 내일 아침에 먹을 해장용 빵을 사는 건가? 파리바게뜨 빵이 서양에서 먹는 빵이랑 맛이 좀 다른 건 알까?'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속내를 파헤치는 동안 다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딱 봐도 외국인인데, 저 아주머니는 표정이 태연한 걸 보니 제법 영어를 하시는 거겠지?'
그야말로 답도 없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있었다. 남자가 늘어놓은 빵을 모두 계산기에 입력한 아주머니는 눈앞에 선 사람이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단 1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단호한 한국말로 빵값을 통보했다. 하지만 최후의 통첩을 날린 그녀의 입에서 "어머, 하나를 빼먹었네?"라는 한국말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주머니는 다시 계산을 하고 또 한 번 정정된 빵값을 알려주는 그 모든 과정 내내 단 한마디의 영어도 하지 않았다.
아뿔싸.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인데 남자가 최소한의 한국말을 이해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아주머니의 입에서 영어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나의 근거 없는 판단력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계산을 마친 남자가 빵이 담긴 커다란 종이가방을 받아 들고 몸을 돌리자마자 나는 다급하게 "따뜻한 라테 한 잔이요!"를 외쳤다. 상대방이 누구든 곧 죽어도 한국말을 하겠다는 당당한 태도의 아주머니와 그 말을 알아듣긴 하는지 입도 열지 않고 무작정 카드만 내미는 남자를 보며 조급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커피 기계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에스프레소를 쏟아냈다. 적당히 봉긋하게 솟아오른 따끈한 우유가 올라간 라테가 내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달려 나갈 채비를 하는데 시커먼 선글라스를 쓰고 핸드폰만 보던 남자가 외국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는 또다시 지레짐작했다. '일행이었나 보네. 남자가 빵을 살 때까지 기다려준 건가? 그다지 친해 보이지는 않는데. 여행 가이드인가?' 모든 추측이 몽땅 틀리는 엉망진창 같은 판단력이었다.
선글라스 아저씨는 키 큰 외국인에게 침착하고 반듯하지만 그다지 능숙하게 들리지는 않는 영어로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보니 선글라스 아저씨가 외국인을 도와주고 있을 거라는 나의 엉터리 추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상황인즉슨, 선글라스 아저씨는 외국인이 입마개를 하지 않은 맹견을 끌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 강남 한복판에 있는 어느 화장실에서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스토커처럼 줄곧 쫓아다녀 빵 가게까지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아저씨가 짧은 영어로 입마개를 하지 않은 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자 외국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지 한국말로 답했다.
"저, 한국에서 15년이나 살았다고요. 제가 무엇을 어겼어요? 제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러는 거예요?"
와우.
아저씨의 영어는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딱 봐도 서양 어느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외국인 총각은 너무나도 능숙한 한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끝끝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 그 빌어먹을 영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한국말로 이야기하면 외국인 총각이 훨씬 잘 알아들을 것 같은데 같은 단어를 무한 반복하는 것 외에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면서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앞에서 끝끝내 영어를 내려놓지 않는 아저씨를 보며 또 생각했다. '영어 회화 실습을 하고 싶으신 건가?' 물론, 이번에도 나의 추리는 엉터리였다.
마침내 커피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와보니 외국인 옆에 딱 붙어 서서 끝없이 심기를 거스르던 아저씨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 있었고 외국인 총각은 개의 목줄을 잡고 황당한 얼굴로 가게 앞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 외국인 총각을 쫓아다니며 영어로 시비를 걸던 아저씨는 결국 112에 전화를 걸어 입마개를 하지 않은 맹견이 있다고 신고를 했고 외국인 총각은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경찰이 올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가 증인이 돼주면 남자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지만 내 코가 석 자라 그에게 "Good luck"을 속삭이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몸은 사건 현장에서 멀어졌지만 말의 온도와 배려에 대한 생각이 한참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파리바게뜨 아주머니가 줄곧 혼자서 내뱉었던 한국어는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외국인을 향한 무관심과 무배려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겉모습은 다르지만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남자를 알아본 아주머니의 인정과 배려였을까? 사나워 보이긴 하지만 법적으로는 입마개 착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개에게 입마개를 씌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멀리서부터 개주인을 쫓아와 한참 동안 시비를 걸었던 선글라스 아저씨의 영어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까, 정말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선글라스 아저씨는 개를 데리고 가는 외국인을 보고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를 졸졸 쫓아다니며 수십, 수백 번쯤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으로 연습한 건지도 모른다. 그가 선택한 영어는 상대방을 위한 언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따뜻함이 실종된 그의 영어는 상대의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진짜 대화를 하려면, 상대의 마음에 닿으려면 어떤 언어를 선택할지 고민하기보다 어떤 온도로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상대를 녹이는 언어는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다.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린 남자를 뻔히 보고도 그냥 뒤돌아오며 내가 던진 한마디 'Good luck!'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었는데도 피곤을 이유로 그 자리를 떠나는 내 자신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뜨뜨미지근했던 나의 'Good 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