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o : 국가의 목적
같은 사건을 다르게 보는 지점에서 우리는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권고사직이었고, 원장 입장에서는 항명에 대한 합법적 대응이었을 것이다. 사직서를 쓰라고 해서 순순히 썼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그러기에 퇴사의 관행인지 알았다. 그때만 해도 사직서를 쓰면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서울에서 강사를 수급해오는 시장 특성상 재취업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넉넉하지 않은 월급이 사라지고 보니 깎여 나가는 통장 잔고의 예각이 살벌했다. 과외 전단지를 붙이며 노심초사 하는 동안 실업 급여가 아쉬웠다. 내가 무지해서 못 타 먹었는데, 궁지에 몰리고 보니 국가가 원망스러웠다.
국가가 내 편이 된 것은 몇 년 후였다. 공장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실업 급여를 타셨다. 어머니는 세상 좋아졌네, 하시며 실업 기간에 고장 난 몸을 병원에 맡기셨다. 그리고 몇 년 후 근로장려금을 받으셨다.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돈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받아도 되는 돈인지 내게 몇 번이나 물으셨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재난지원금을 받으며 당신께서 알던 국가와 달라진 국가를 이해하셨다. - 가난 구제는 나랏일이다.
어머니는 빈민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에서 나를 기르셨다. 어머니의 국가는 쿠데타, 광주, 부산-마산 등의 폭력과 IMF 금융위기의 무책임으로 체험되었다. 나라가 폭력으로 개인에게 충성을 강요하면서 나라 구제를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던 시절이었다.
빈곤이 개인의 책임인 시대는 갔다. 세계 총 생산량을 총 인구수로 나눈 값은 절대적 빈곤과 무관했다. 더군다나 한국은 GDP 세계 10위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빈곤은 생산-분배의 구조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돈을 낳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른 빈부 격차는 필연이겠지만, 불평등 정도가 도를 넘었다. GDP 세계 10위의 나라에서 최소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되었다.
20세기 초 컨베이어벨트 시대 이후 상품의 대량생산 시대가 열렸다면, 21세기 초는 실업의 대량생산 시대가 열리고 있다. 최근에는 키오스크의 등장으로 아르바이트 자리가 학살되었으며, 자율주행자동차의 등장은 버스/택시 기사의 멸종을 예고한다. 그리고 챗GPT가 등장했다. 청년, 장년,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실업으로 인한 빈곤은 확실한 미래이다.
가난 구제가 국가의 품질을 결정한다. 아직도 북유럽 복지에 대한 환상이 유효하다. 그러나 이제 가난 구제는 국가의 품질을 넘어 존재 이유다. 가난을 구제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2. Yes : 고립 구제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돈이 없어 병원을 미루다 보면 더 커진 병이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청구해 온다. 물론 국가가 성장함에 따라 이 이자율은 낮아지는 중이고 언젠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끝내 감당하지 못하는 가난도 있다. 가난의 자식, 고독사는 국가가 감당할 수 없다.
죽어서야 존재하는 사람들. 지금도 어느 방구석에서 어떤 시신은 홀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구더기들만이 그들의 죽음을 배웅한다. 죽음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죽음의 원인은 결국 가난이다. 부자는 고독사할 수 없다. 부자 곁에는 간병인이라도 있다.
고독이라는 감정에 죽음을 합성하는 명명은 부당하다. 삶이 고독하다면, 죽음은 고독을 끝내는 일이다. 삶이 고독하지 않다면, 죽음은 그 자체로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라는 고독의 정의를 실현하므로, 고독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쓸쓸하게 방치된 죽음이 고독사로 명명된 순간, 그 죽음이 개인감정 범주로 제한되는 것이 문제다. 이 죽음은 사회적 고립에 의한 것이므로 사회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이름은 고립사가 정당하다.
고립사는 내가 예감하는 오래된 미래였다. 88만원 세대 시절에는 통장 잔고가 내 죽음을 정확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인간관계는 돈이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으로 내 명줄을 늘렸다. 요즘은 내가 써 놓은 글들이 내 죽음을 왜곡해서 설명할 것이다. 사람이 귀찮아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으로 내 글에 우울을 녹여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 때문에 일주일 내에 내 시신이 발견될 것이므로 고립사는 완성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내 노년에 고립사는 필연일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가난해질 것이고, 더 꼬장꼬장해질 것이다.
내 고립사에 특별한 감정은 없다. 내 시신을 토막 내서 쓰레기봉투에 나누어 버리더라도 살아있는 나와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고립이 만들어 내는 파편화 된 삶들은 문제다. 관 같은 방구석에서 각자의 고독을 먹고, 배설하고, 그것을 다시 먹고 배설하는 악순환을 하며 천천히 시들어가는 국민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건강할 리 없다.
국가가 개인의 고립을 구제할 수 있을까? 절대적 빈곤은 구제하더라도 상대적 빈곤 때문에 각자의 방으로 숨어드는 준히키코모리들을 무슨 수로? 내가 죽은 날, 그리고 며칠, 몇 달을 내 노트북은 [무한도전]을 반복재생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썩어가는 방에서 하하의 외침이 공허하다.
죽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