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by 하루오

1. Yes : 부당거래


엄마에게 함부로 구는 학생들을 종종 본다. 엄마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로 해석하는 이기적 지능에서 갑질이 싹튼다. 특히 고3 엄마들은 아이의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함으로써 갑질을 부채질한다. 어떤 엄마는 간혹 썩은 속을 고백하며 우신다. 학생은 엄마의 울음 위에서 폭군으로 군림한다.


엄마는 우리가 김칫국을 마시면 떡 줄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다. 혹여나 떡이 맛없을까 걱정하고, 오히려 김칫국을 더 권한다. 자식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모정은 필사적이다. 자식이 나이 들수록 자식은 엄마의 김칫국을 마시지 않으므로 자식이 김칫국을 마실 때, 엄마는 떡을 줄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한다. 할머니가 음식에 필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음식은 그들이 줄 수 있는 유일한 떡이다.


세상은 엄마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김칫국을 마신다. 다양한 직업의 형태로 우리가 역량을 발휘하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세상이 기대치만큼 떡을 내주어야 한다. 가래떡이 틀에서 쥐어짜지듯이 영혼을 갈아 넣어 월급을 받는다. 세상이 들이킨 김칫국에 준하는 떡을 내지 못할 경우 도태된다. 벅차서, 엄마에게 전화한다. 잘 지내니, 잘 지낸다, 거짓말을 나누고 다음 떡을 준비한다. 세상 참 개떡 같다.


우리 중 일부도 꽤 개떡 같다. 우리는 시민이자 소비자이지만, 일상에서 시민은 잊고 소비자만 남긴다. 소비자는 사춘기 세게 맞고 엄마에게 함부로 굴던 청소년처럼 자기중심적이다. 소비자의 권리를 갑옷처럼 입고 푼돈으로 자영업자들을 유린한다. 돈 때문에 고개 숙였던 기억을 보상 받으려는 듯 악착같다. 서비스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을 확정한다. 당신이 단골이든, 리뷰를 써주든 그에 대한 보상 여부는 자영업자가 선택할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소비자 권리로 판매자의 자유권을 자의적으로 제한한다. 엄마는 당신을 사랑하기라도 했지만, 자영업자는 푼돈이 필요할 뿐이어서 그들의 속은 더 썩어 문드러진다. 전화 상담원, 일부 공무원 등 감정 노동을 하는 직군들은 매한가지다.


우리는 소비자 이전에 민주 시민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자유, 평등으로 이해하지만,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자유, 평등, 박애와 함께 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면, 김칫국을 들이키며 떡을 강탈하려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을 잊은 소비자는 엄마가 없나.



2. No : 시크릿 법칙


시크릿 법칙을 믿지 않는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선언은 성공한 사람들의 결과론적 자기미화일 뿐이다. 물론, 이 법칙을 믿으며, 간절히 노력하는 사람을 돕는 자들은 멋있다. 그들의 멋있음과 시크릿 법칙의 진위 여부는 별개다. 시크릿 법칙은 실패자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고, 나는 오래된 실패자다.


지금까지 나를 살게 만든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희망이 좌절될 때마다 닥치는 우울은 자살 직전까지 나를 내몰았다. 나를 해치우지 않은 것은 신념이 아니라 겁이 많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나로부터 살아남았고, 어떻게든 육중한 우울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희망을 버렸다. 희망하지 않는 한 절망할 일도 없었다.


SNS에 과시된 카르피디엠 이면에 있는 MZ세대의 속마음일 것이다. 자아실현을 위해 인류 최대의 노력을 퍼부었지만 부모보다 괜찮은 직업을 갖기 힘든 세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꿈 꾼 적 없었을 것이다. 공무원이 장래희망 1위인 나라에서 희망은 성취보다는 안도에 가까운 개념으로 전락한다. 시크릿 법칙이 유통될 만큼 호락호락한 시절은 끝났다.


희망이 거세된 일상은 평온했다. 평온이 오래되자 시시했다. 한 해, 한 해 밥벌이와 기타 등등의 유희가 반복되며 조금씩 늙어가는 시간은 지루하다. 10년 뒤에 끝나든, 내일 끝나든 상관없는 뻔한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소소한 우울이 지속된다. 이때, 나를 살게 만든 것은 다시 희망이었다. 플랫폼을 통해 내 글을 공유했다.


미래는 떡 줄 생각도 없는데, 현재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인지도 모른다. 출간을 희망하고, 출간 이후에 바뀔 내 인생을 그린다. 성공도 좋지만, 하드 디스크 속으로 폐기 되었다고 생각한 내 과거가 미래를 위한 노력의 시간으로 각색될 수 있는 것도 좋다. 열등감, 부채감으로 점철된 내 과거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법 성실히 쓴다. 내일은 내일의 쓸 거리가 있는 사실이 좋다.


물론 모든 김칫국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현실 자각이 불완전할 경우 낙관은 인간을 돈키호테로 만들 뿐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재능 없는 영역의 노력은 인생을 무위로 만들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나는 김칫국을 들이킬 자격을 갖췄는가. 이렇게 대답한다. 1년쯤은 자격을 갖춰 볼 노력을 더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일단, 김칫국이 일상을 개운하게 씻어주니 그걸로 됐다고.


당신들은 이렇게 살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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