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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Sep 26. 2023

당근 - 프로메테우스는 뭐 어쩌라고

당근은 위대하다. 인간 관점이 아니라 당근 자체의 관점이다. 불의 발견 이후 인류의 식문화는 화식으로 변했다. 먹지 못하는 것들도 불에 닿으면 먹을 만해졌고, 먹을 만한 것들 중 맛있는 것들이 인류 곁에 남아 개체수를 늘렸다. 당근도 인위선택의 압력에 휩쓸려 지금의 형태를 갖췄겠지만, 유독 고고했다. 불과 타협하지 않았다. 상추를 제외하면, 날 것으로만 먹어야 하는 몇 안 되는 식재료다.


당근의 기억은 의문으로 시작한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으며 생각했다. 식재료로서 당근의 의미는 뭘까? 엄마가 그냥 먹으라고 해서 계속 그냥 먹어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지만, 카레 속 당근을 선호하지 않았다. 같은 뿌리채소인 무는 익히면 수분을 풀어 헤치며 부드러워지지만, 익힌 당근은 어중간했다. 카레 속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은 내 기준에서는 괴식가다.


물론, 단 맛을 낸다. 그렇다고 해도, 설탕은 폼이 아니다. 꿀도 있다. 양파나 배도 단 맛을 낸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만 당근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주황빛 색감은 푹 익어 흐물거리는 식감 덩어리와 등가 교환되지 않았다. 어른의 권력이라며 당근 없이 고기와 감자로 된 카레를 먹은 사람이 부러웠다. 엄마에게 요청해 봤자 소용없었다. 엄마는 이미 [알토란]인지, [황금알]인지에서 당근의 효능을 보셨다.


찜닭도 당근을 품으며 등장했다. 색감 때문이라면 비겁했다. 짜장면을 본받아야 했다. 짜장면은 설탕과 양파로 단맛을 채울 뿐, 시각적으로 요란 떨지 않고 우직했다. 찜닭의 본질은 닭고기다. 김치가 있다면 채소는 거들지 않아도 되었고, 굳이 거든다면 파나 양배추면 충분했다. 치킨도 치킨무 하나로 충분했다.


하물며 갈비찜은 자존감이 낮았다. 돼지, 혹은 소, 그 자체로 기고만장할 만한 식재료였다. 돼지나 소가 여중생처럼 화장할 필요 없었다. 신통치 않은 잔재주는 없어도 그만인 정도가 아니라 없으면 더 좋았다. 횟감 밑에 깔리는 천사채처럼 안 먹어도 그뿐이기에는 아쉽지만 역시 왜 굳이. 그러나 세금처럼 먹긴 했다. 갈비찜은 자기 존엄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애초에 한식은 메인 요리가 독자적으로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는다. ‘상차림’은 메인요리와 밑반찬의 어울림을 함의한다. 혼자 모든 색감을 감당할 필요 없다. 특히 붉은색 계열에는 김치가 항상 존엄하다. 짜장면에게 단무지가 매달린 것처럼 카레, 찜닭, 갈비찜은 색감을 밑반찬에게 하청 줘야 했다.


당근을 타협할 수 있는 것은 잡채나 비빔밥까지였다. 채 썬 당근은 식감의 존재감이 희석되며 색감만 남았다. 그러나 파프리카가 등장하면서 붉은색 계열의 색감과 단맛은 굳이 당근일 필요도 없어졌다. 감자볶음 정도가 최후 보루였다. 당근은 감자의 퍽퍽한 식감 사이를 완충했다. 그럼에도 ‘당근은 없으면 안 넣어도 된다.’는 유효했다.


꼭 필요한 게 아닌데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넉살, 너희가 싫어하든 말든 자신은 기어이 자신이고 말 테다는 귀여운 고집, 문명을 거스르는 자, 당근이었다. 채 썬 당근이 휘어져 있을 때는 웃는 모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당근은 고기보다 자존감이 높을지도 몰랐다. 소나 돼지는 상호 대체 가능하더라도 당근은 표면부터 속까지 순수하게 주황색인 유일 생명체였다. 우리가 성가셔하든 말든, 단단한 주황은 당근이지, 했다.


하긴, SNS 때문에 이제는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걸 너머 그것만이 떡인 시대가 되었다. 인스타 감성은 대상의 모든 본질을 해체하고 가시성만 남겼다. 그러나 이 도식은 카페를 향하지 카레와 무관할 텐데도 왜 굳이 당근이어야 하는가? 요리를 모르는 순수 소비자 입장에서는 정말 모르겠다.


맛에는 관대한 편이라 음식에 들어간 모든 당근을 먹었다.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밥상머리 교육의 흔적이기도 했고, 영양학적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베타카로틴의 역할이 정확하게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유채색 채소 특유의 건강한 성분이 있다고 하니, 영양제 대신이라 생각하면 못 먹을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당근의 당위가 확보되는 건 아니었다. 영양은 엄마의 당위였다. 식당의 당위는 맛에 있다. 화식에 길들여진 보통의 인류는 적정 수준에서 몸을 헤치더라도 맛을 선호했다. 탕후루, 떡볶이, 치킨에 열을 올릴 만큼 무모했다. 불과 결합된 설탕, 탄수화물, 그리고 튀긴 음식은 과할수록 좋아서 맛의 크기를 칼로리로 수치화 하면 대체로 맞았다.


불이 없어야 맛의 최선이 보존되는 행태는 내 집밥과 잘 맞았다. 나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라면 끓일 때나 가스레인지를 사용했다. 유통기한 2019년 7월 17일 식용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제조일을 잘못 본지 알고 확인했지만 유통기한이 맞았다. 당근은 대체로 씻어 나오므로 내 귀차니즘과도 잘 맞았다. 무처럼 칼로 자를 필요도 없는 사이즈였다. 그러나 굳이 당근을 찾지는 않았다. 당근의 최선은 내 최적과 타협되지 못했다.


당근은 기본적으로 맛이 없었다. 삼겹살이나 생선회의 사이드로 나올 때, 나는 당근보다 오이를 선호했다. 수분을 가득 담은 오이에 비해 당근은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했다. 자기주장성 덕분에 씹는 맛은 있었지만, 굳이 돈 주고 찾을 매력은 아니었다. 당근이 맛있어지려면 즙이어야 했지만 비쌌다. 내 의미 범주 안에서 당근은 도라지 수준의 약재 의미를 획득한 채소였다.


어느 날 문득, 당근과 커피가 내 점심이었다. 타인에게 권할 만한 조합은 아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 30분 동안 허기와 피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응급조치였다. 점심시간을 줄여 퇴근 시간을 당기고자 했고, 30분 안에 밖에 나갔다 오기 귀찮았다. 그냥 누워서 당근을 또각또각 씹어 먹다가 앉아서 몸을 반쯤 일으켜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는 형태였다. 이렇게 획득한 칼로리 이득을 한 주가 끝나는 날 폭식에 사용했다. 칼로리 앞에 떳떳해지는 정의를 실행 중인 셈이었다.


당근은 한참 씹어야 했고, 씹은 만큼 포만감을 줬다. 좋듯 싫든 내게 가장 유용한 채소인 셈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필연, 당근이 부러웠다. 화식은 식문화에 국한된 혁명이 아니라 문명의 시발점일 텐데, 당근은 화식을 무시한 것이다.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온도에 맞춰 이리 볶이고, 저리 찌이며 형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묵묵히 당근을 먹는다. 특정 동물의 생식기가 정력에 좋다는 직관적인 믿음 같은 거다. 아력(我力) 53만쯤은 되고 싶어서.


꽁다리를 물에 담가 두니 싹이 나네요. 무서운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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