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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n 20. 2024

수성구에서 논술을 가르칩니다

대치동, 목동, 그리고 수성구다. 사교육 시장에서는 지방의 강남이란다. 강남이 코로나로 봉쇄되었을 때, 수성구는 강남의 원정갈 수 있는 대안이었다. 2012년 이 동네 모 학교에서 수능 만점자 4명이 나오기도 했다. 전국 부동산이 침체되어 있을 때, 수능 만점 4인방이 대구 아파트 값을 끌어 올렸다. 의외의 성과가 아니라 본래 그런 동네였다. 그렇고 그런 학교들의 연합, 수성구다.


2012년, 나는 수능 만점자 4명이 나온 학교 앞에 있던 논술 학원에 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시작한 국어 강의는 과연 포도청이었다. 수업은 무능해서 먹물 막장으로 기어든 내게 ‘네 죄를 네가 알렸다’를 따지는 시간이었다. 교재 뒤에 해제가 있는데 왜 학원에서 배우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흉내내는 돈벌레였다. 시험 기간에 학교마다 교과서가 다른 내신을 준비해야 하는 비효율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행히 그 학원의 주력은 논술이어서 그 해 여름, 첨삭 강사를 시작으로 논술로 전향했다. 천운이었다. 학생들에게 첨삭이 필요해서 논술은 교재만으로 해결될 수 없었다.


원장님은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준거집단 구성원들에게 그토록 압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학부생으로서 교수님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머리 쓰는 거라면 나도 만만치 않다 자신감은 우물 안 오만함일뿐이었다. 당시는 대학에서 기출 문제만 공개할 뿐, 해제를 따로 배포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사의 역량에 따라 해제가 달랐다. 원장님의 해제는 짜증날 정도로 신세계였다. 강의력도 압도적이었다. 교주적 카리스마라는 걸 처음 겪었다. 왜 사람들이 똥을 된장이라 믿게 되는지를 실감했다. 당신의 승승장구는 납득 가능했다.


그런 강사가 되고 싶었고, 몇 년 후 나쁘지 않은 논술 강사가 되었다. 강의력은 모르겠다. 과외는 중앙강의와 다르므로 영영 비교할 수 없어졌다. 그러나 해제만큼은 당신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내가 당신에게 보내던 경탄을, 내 학생들이 내게 보냈다. 특히 타 학원에서 논술을 겪었던 학생들은 나의 남다름을 알아 봤다. 첫 수업 들어보고 결정하라고 했을 때, 이탈자는 없었다. 학생들의 신뢰로 자존감을 채웠다.


그러나 성과가 미약해 나는 시장에서 잘 가르치는 강사는 아니었다. 변명하자면, 좋은 재능들을 데리고 수업해야 성과가 좋을 확률이 높았지만, 좋은 재능은 학원에서 먼저 끌어 가고, 학원에서 이탈한 학생을 1학기 기말고사 끝날 즈음에서야 내가 받게 되니, 기울어진 운동장의 게임이었다. 어떻게든 학생들 실력을 끌어 올려 후보 단자리 안에 들게 만들어도 합격하지 못한 모든 성과는, 실패였다. 매년 12월, 자존감은 바닥을 찍었다.


고등부는 단가가 셌지만 수급이 불확실했다. 대형 논술 학원도 겨울-봄은 춘궁기였고, 나는 세 달 연속 수입이 0원인 해도 있었다. 월 백 만원을 버느냐 못 버느냐로 스트레스 받다가 여름-가을 성수기에 바싹 벌었다. 바싹 벌면 몸이 축났고, 바싹 벌지 못하면 마음이 축났다. 8월에 수업 시작한 학생을 연세대 경영학과에 합격시킨 이후, 소개의 물꼬가 트일지 알았지만 귀신 같이 고요했다. 합격자 0을 기록한 해, 다음 해 내 밥벌이도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꾸역꾸역 수요는 있었다. 연봉 총액이 깎이더라도 수입이 안정적이길 바랐다.


중등부 확장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밥을 벌어 먹은 이후로 내 의지로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내가 내 필명을 하루오로 정한 것도 이장욱 님의 소설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루오는 강물의 흐름을 따라갔다. 가끔 손을 저어 의지를 표명했지만, 그건 흐름을 타기 위한 몸짓 같았다. 나는 돈으로 된 강물 위에서 감히 손짓도 할 수 없었다.


“하루오 선생, 중등부 준비해봐.”

네? 제가요? 원장님에게 되물을 수 없었다. 논술 2년차인가 3년차에게 뭘 믿고. 오너의 기대와 믿음에 감사해야 함을 그때는 몰랐다. 그냥 노는 인력 쥐어 짜려는구나, 으이구, 내가 어렸다. 독서논술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내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까라니 깠다. 모든 사교육은 입시로 귀결되므로 입시 논술을 기반으로 독서를 연계했다. 독서논술 수요가 미미하던 시절, 사교육에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려는 도전은 깔끔하게 실패했다. 혹은 내가 미진했다.


나는 바뀌지 않았다. 학원을 나와서도 하던 대로 했다. 중등부 독서논술은 한 팀, 혹은 두 팀이 덤처럼 운영되었다. 그 정도면 춘궁기를 버티게 해줄 구황작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덤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을 전해올 때의 힘으로 내가 틀리지는 않았나 보다, 했다. 하던 대로 아등바등 하고 있을 뿐인데, 시대가 내게로 오기 시작했다.


[sky캐슬]에 감사한다. 정시에 몰입하던 수성구에 학종 개념을 이식했다. 학부모님들은 학종에서 ‘독서’를 의식했고, 드디어 ‘국어 내신도 봐주시나요?’ 같은 질문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내신과 정시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지만 내신을 다룰 것 같았으면 춘궁기 연명을 위해서라도 ‘국어-논술’을 했을 것이다. 나는 독서논술 순혈이다. 중등부 두세 팀은 덤치고 든든했다.


조금 더 지나자 시대가 글쓰기를 호명했다. 수행평가에서 글쓰기가 중요해진 것을 학부모님들이 체험했고, 여기저기서 글쓰기를 수군거렸고, 수능도 서술형으로 나온다며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사교육은 불확실한 공포로부터 움직이므로 수요는 ‘독서’보다는 ‘글쓰기’로 옮겨 갔다. 나는 하던 대로 하고 있을 뿐인데, 중등부 독서논술에서 나처럼 하는 데는 없는 모양이었다. 내게는 고등부 첨삭하던 습성과 내 졸고를 전문가에게 첨삭 받고 싶은 간절함이 남아 있었다. 학생이 글을 쓰는 한, 나는 최선 비슷한 것으로 응했다. 내가 글쓰기에 짓눌려 살았기에, 너희는 글깡패가 되어 수행 같은 간단한 글쓰기는 패고 다녀야 했다. 너희의 승승장구는 내 한풀이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도 많을 테고, 나보다 입시 논술을 잘 아는 사람도 많을 테고,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도 많을 테고, 나보다 강의 잘하는 사람도 많을 테고, 나보다 창의적인 사람도 많을 테지만, 이 모든 요소의 교집합을 갖춘 사람은 드문 듯했다. 여기에 친근하고 유쾌한 강사 캐릭터가 입혀졌다. 처음에는 하루오에게 없는 이 활달함이 자본주의의 주작용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그러나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강사에 가까운 캐릭터로 조카들을 돌보고 있어 강사 또한 나의 진짜였다.


2023년, 중등부가 갑자기 우당탕탕 늘더니, 2024년, 초등부까지 얼럴뚱땅 갖춰져 버렸다. 초등 5학년부터 대입논술, 편입논술까지 교육 대상 스펙트럼이 넓어져 대입/편입 전문성이 떨어져 보인다. 초등, 중등생은 나의 무거움을 모르고, 고3, 편입 준비생은 나의 가벼움을 모른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호환은 어렵지 않게 ‘나’로 연동된다. 지금까지 글로 남기지 않던, 하루오가 아닌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표지 : 논술쌤 초상화 3종 세트 - 대평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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