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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an 19. 2021

슬램덩크 - 포기하는 용기

선생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전, 없습니다.

어른의 말씀이 필요할 때, 또 연락해도 되죠?


내게 고3이었던 학생이 말했다. 학생은 작년 가을에 대학을 졸업해서 올해 백수 2년차에 접어들었다. 학생과 헤어지고 나서 나는 ‘어른’을 오래 곱씹었다. 내가 어른이라니, 민망했다. 학생 나이의 나는 더 멍청하고 막막하게 보냈었다. 나는 풋내기다.


모든 인간은 그 나이를 처음 산다. 그래서 매번 서툴다. 학생에게 내 나이는 앞선 나이를 잘 살아낸 훈장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훈장의 허술함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학생의 기대처럼 내가 살아본 나이에 대해서는 조금 말할 수는 있다. 그래 봤자 후일담이나 반성문 수준이다.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가 봐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안다. 그 나이에는 그 나이에 맞는 풋내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리고 대부분은, 천재 강백호가 아니다.



어렸을 때는 주인공을 응원했다. 강백호와 라이벌인 서태웅을 중심으로 [슬램덩크]를 읽었다. 안 선생님이 ‘보고 있나 재중군!’하며 감탄할 정도로 두 사람은 모두 농구의 천재들이다. 강백호의 리바운드 재능이 개화해 나갈 때, 서태웅이 윤대협과 정우성을 넘어설 때, 초사이언의 등장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내심 내게도 그런 천재성이 내재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 삶의 조연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삶은 소년 만화가 아니었다. 무한한 용기로 적과 맞서 싸우면, 현실 세계에서는 삶은커녕 생존마저도 위태로워진다. 내 삶에서 주인공 자리는 돈에게 내주고 나는 돈을 보조하는 조연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잠시 느낀 주인공의 기억에 기대서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고 자위하겠지만, 딱 그 정도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강백호의 친구1, 2, 3, 4도 짧게나마 주인공의 순간은 있었다.



주인공은 재능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재능에는 돈이 따르므로 재능의 주인은 주체적으로 재능을 발휘하기만 하면 된다. 재능의 천재가 삶의 천재와 등치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재능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명징하고 우월해서 삶의 인사이드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인사이드를 차지해야 리바운드를 지배하고, 리바운드를 지배해야 시합을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삶도 인사이드를 지배해야 기회를 몇 번이고 리바운드해서 삶을 지배할 수 있다.


최악은 어중간한 재능이다. 지역 단위의 인사이드 왕자 채치수의 미래는 어둡다. 동급생인 신현철에게 밀렸고, 후배인 김판석이나 강백호에게도 언젠가 따라 잡힐 재능으로는 대학 농구에서 빛 보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천재 후배 덕분에 일찌감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가업을 물려받은 변덕규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채치수에게 남은 건 손에 잡힐 듯한 희망에 중독되어 자기 삶을 파먹는 것이다. 나 역시 소설 쓰는 나부랭이가 되겠다고 여행, 연애, 인간관계를 포기했었다. 그런 주제에 나는 운이 좋아 중고등학생에게 논술을 가르치며 밥은 먹고 산다. 채치수는 자신의 실패를 경험 삼아 신도시에서 중학생 농구 교실로 밥줄을 연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야 입시 덕분에 수요가 어느 정도 있지만 농구는 그게 아니니 채치수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열한 번 찍어도 안 넘어간다. 노력으로 어찌될 만큼 삶은 물러터지지 않았다. 사실 노력 자체가 재능이다. 나이 마흔이면, 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가 누가 아닌지 정도는 안다. 우리가 불꽃남자 정대만이 아님은 99%에 수렴한다. 1%에 매달리며 인생을 낭비할 용기는 무모함과 다르지 않다.


정대만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투혼의 상징이다. 그러나 정대만 역시 도내 중학교 MVP 출신의 천재였다. 그저 방황하느라 농구와 멀어졌을 뿐, 경기를 거듭할수록 빠른 속도로 농구 감각을 회복했다. 몇 년 후, 서태웅에게 새로운 라이벌이 생긴다면 정대만은 유력 후보 중 한 명일 것이다. 반면 우리는 포기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내일 하지.’에 익숙해졌다면 정대만을 입에 담지 말자. 불꽃은 그리 시시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정대만의 ‘농구가 하고 싶어요.’만큼의 처절한 간절함이 없다. 먹고 살기 힘들면 그저 돈을 안정적으로 벌고 싶고, 돈을 안정적으로 벌면 열정이 식는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노래하지만, 나이는 열정과 반비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진 탓이기도 하다. 결혼한 사람들은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결혼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이 늙어 계시니 제 한 몸이 가볍지만은 않다. 열정밖에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열정, 그게 이렇게 귀해질지는 몰랐다. 나를 타오르게 할 무언가에게 몰입할 시간과 돈을 갖췄는데, 정작 불씨가 꺼져버렸다.



백수를 시작한 학생은 이런 내게 인생을 물은 것이다. 열정이 결여되어 미지지근한 나이가 25살짜리 취준생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다. 언제 없어질지 모를 열정에 충실하라고 하기에는 내 꼴이 우습다.


마흔이 넘어 슬램덩크를 다시 보니 안경 선배 권준호가 눈에 들어왔다. 어중간함의 표본이다. 기본기는 있지만 주전이 될 만큼은 아니다.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농구를 하지 않았을 때 아쉬움이 남는 정도지 채치수처럼 전국재패를 이루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떨 정도도 아니다. 능남전에서 역전 3점 슛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평생의 안주거리 하나 얻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너무 못나지도 않고 너무 잘나지도 않아 어중간한 나와 당신의 모습일 것이다. (사실은 이보다 못한 경우가 많겠지만.) 천재들은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양손이 발이 되도록 노력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아니, 그런 노력조차 천재의 영역이다. 우리는 주연이 아니다. 농구를 포기하고 입시에 매진하는 권준호의 판단력이 필요하다.



조연은 꾸역꾸역 산다. 전성기, 그런 건 강백호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단호한 결의를 해서 멋진 것이 아니라 단호한 결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재능러들이기에 멋진 일들이 따라 붙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성기는 없다. 기대하지 말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전성기를 기대하는 헛된 희망이다. 사자에게는 사자의 중용이 있고, 토끼에게는 토기의 중용이 있다. 권준호가 채치수나 정대만처럼 농구에 매달렸다면, 그래서 주전만 뛰게 하는 안 감독의 용병술에 불만을 품으며 농구에 몸을 불살랐다면, 대입에 실패하한 어정잡이 엑스트라로 전락했을 것이다.


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자아실현’의 저주를 씌웠다. 개인은 자유 의지에 의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단다. ‘Impossible is nothing’이므로 ‘Just do it’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자아실현’의 대상이 될 만한 직업군은 제한적이고, 사람마다 재능도 천차반별이고, 부모의 재력에 따라 노력할 수 있는 기회조차 차등적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자아실현과 무관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매주 로또 1등이 수 명씩 나오지만, 그게 나일 확률은 거의 없다. 로또 1등 당첨의 자유만큼 얼빠진 논리도 없다. 마흔은 불혹이다. 꿈에 혹해서는 안 될 나이다.


이 또한 풋내기의 개똥철학이다. 틀릴 확률이 높다. 그래도 포기하면 편한 것을 경험적으로 확신한다. 포기하는 순간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시합도 끝난다. 우리가 모두 시합에 뛸 필요는 없다. 경기장 밖에서 소소하게 행복한 길을 찾아나가는 방법도 있다. 우리는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이 아니니까. 강백호의 친구 1, 2, 3, 4는 별 볼 일 없는 군상들이지만 함께 해서 즐거웠을 것이다. 일상화 된 패배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포기할 용기다.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별 볼 일 없는 중용이 있다.


슬램덩크는 멋있지만, 레이업슛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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