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 하니]를 보다가 문득, 한숨이 나왔다. 유재석, 당신의 무한도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남긴 [무한도전]에 머물러 있는데. 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내 한숨이 가볍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부터 포기하는 데 익숙해졌다. 어차피 어제만큼의 시간이 반복될 뿐이고, 내가 잘 될 리 없다. 나는 글을 쓰고-먹고-자고 글을 쓰다가, 일하고-먹고-자고-일하는 몸짓이다. 목구멍에 필요한 것은 익명의 노동일 뿐이어서 나는 열심히 몸부림치는 익명이다.
생계에 매몰된 사람들은 기억도 가난해진다. 작년 이 즘에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고, 어제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하다. 오늘도 잊히기 위한 날들 중 하나일 뿐이다. 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꽃을 욕망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이 삶으로 합산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잊히고, 이름을 부여 받은 시간만 기억으로서 삶에 합류된다. 사라지는 시간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만, 마트에 가고, 밥을 먹고, TV를 보고, 게임을 하고, 월세를 입금하는 일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붙이더라도 있으나마나 하다. ‘살아가다’와 ‘죽어가다’가 동의어임이 새삼 실감난다. 생존의 대가로 하루를 삭제 당하는 모순이 허망하고, 허망함에 무뎌져 허망하지 않아서 또 허망하다.
30대 이후의 내 기억은 무한도전에 가장 많이 빚지고 있다. 07년부터 조세호가 들어올 즘까지 정주행만 두 번했다. 08년부터 정형돈이 이탈할 즘까지의 정주행은 너덧 번쯤 된다. 몇몇 편은 열 번도 넘게 봤다. 본다기보다는 멤버들의 소리를 빈 방에 풀어 두었다. 밥 먹을 때, 청소할 때, 인터넷 서핑할 때, 그냥 아무 것도 안 할 때마다 재생했다.
2006년 10월 바지에 고구마를 넣고 달리다가 넘어지는 노홍철, 2007년 1월 정준하와 박명수를 멀리해야 한다는 유재석의 사주, 2008년 1월 드라마 [이산]에 카메오로 출연한 박명수의 비싼 발 연기, 2009년 2월 정준하의 가장 높은 IQ, 2010년 9월 레슬링 경기가 끝나자 유재석과 정형돈이 포옹하며 흘리는 눈물, 2011년 2월 길의 첫 사랑을 찾아 리포터로 나간 노홍철의 흥분, 2012년의 못친소들, 2013년의 12살 명수, 2014년의 토토가, 2015년의 식스맨이 내 30대의 기억이었다. 그 외에는 돈을 못 벌거나 돈을 벌었다.
요즘도 아침을 먹으며 [무한도전]을 본다. 2007년 박명수는 2020년 나보다 어리다. 동생이 된 박명수가 내일 모레 40이라며 징징댄다. 마흔 살은 흑채를 뿌려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다. 박명수를 거울처럼 바라보면 기억이 궁핍한 내 나이가 구체적으로 무참해진다. 나는 너무 오래 꿈에 매달렸다가 삶이 구질구질해져서야 꿈을 향한 무모한 도전을 끝냈다. 아무도 내 소설을 호명하지 않으므로 나는 오래도록 존재하지 않은 몸짓이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부럽다. 이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한도전은 매 회 다른 주제를 채택하기 때문에 모든 촬영이 특집으로 명명되었다. 생계와 기억이 직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부러운데 그들은 매주 하나씩, 2006년 5월부터 2018년 3월까지 563개의 기억을 누적했다. 나는 내 13년 속에서 그만한 기억을 건져낼 수 없다. 2010년 겨울에 무한도전 사진전에 갔을 때, 두 층을 가득 매운 그들의 사진들과 업데이트 되지 않는 내 미니홈피 사진첩의 간극에 주눅 든 적이 있었다. 그나마도 많은 사진들 중에서 가려내고 편집된 사진들일 텐데도 폐기된 내 기억 따위는 댈 게 아니었다. 노홍철은 나보다 기껏 두 살 많을 뿐인데, 기억 양만 따지면 내 고조할아버지만큼 산 것 같았다.
기억의 품질도 그들이 우월했다. 2011년 조정에서 배가 결승선을 통과하자 정형돈이 외친 “easy oar!”는 다른 세계의 울림 같았다. 최선을 다한 자만이 터트릴 수 있는 진심. 무한도전 멤버들은 그들의 삶의 이름을 스스로 만든다, ‘무한도전’이라고. 언젠가 그들의 무덤 앞 비석에는 ‘무한도전’이라 새기고, 조문객들은 외쳐도 된다. easy oar. 그런 자격을 갖춘 기억을, 그들은 무한도전이 끝나고서도 각자의 영역에서 새겨 나가고 있다.
반면 나는 일상의 반복과 잔잔한 외로움 속에서 감정의 진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좀 심심하고, 적당히 짜증나고, 간혹 웃었다. 물론, 최선을 다했던 사랑이 불발된 기억 몇 개 정도는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들을 떠올려도 무덤덤한데, ‘easy oar’는 볼 때마다 코끝이 찡해진다.
그들의 체험이 내 경험이어서 내가 무한도전을 기억할수록 나는 간접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는 점점 내 기억과 관계없는 인간이 되어간다. 이제는 무한도전도, 나도, 지겹다. 상꼬맹이 하하가 세 아이의 아빠가 되도록 나는 잔돈 같은 기억 몇 개만 얻어냈을 뿐 나이만 성실하게 먹었다.
내가 무화되어 가는 것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대로 살다가는 앞으로도 사라질 일만 남았다는 위기감에 ‘이대로 살던 나’라면 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시도했다. 이를 테면 방송 댄스. 열댓 명의 여대생 사이에서 나만 아저씨였다. 여성이 많은 반이라 걸그룹 춤을 했다. 허리를 숙이면 손끝이 무릎 아래에 간신히 닿는 뻣뻣한 몸으로 노홍철식 몸개그를 선보이며 어색함을 버텼다. 관음 변태로 오해받을까봐 조심하다 보니 음악과 별개로 몸을 허우적대는 일은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다행히 코로나가 터졌다. 다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여전히 내 삶에는 이름이 없다. 내게 남은 것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얻어진 내 이름 석 자와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똥.덩.어.리. 같은 나이가 전부다. 그래서 이 글을 써본다. 혹시 호명될 수 있을까 싶어서. 나도 easy oar를 외칠 자격을 갖추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