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나이,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억울한 나이, 마흔이다. 청년을 더 뻗대고 싶지만 중년에 곧 항복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결혼과 상관없이, 마흔에 선고된 아줌마, 아저씨를 부정할수록 처지만 궁색해진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라고 따질 기분도 아니다.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의 시절, 2020년이 너무나도 까마득해 나와 무관한 시간일 것 같던 그 시절, 내가 고작 이런 인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 아이와 나는 이종(異種)이다. 결혼 평균 연령 즘에 결혼하고 자식을 봤다면, 지금 그 아이만 한 자식이 있을 나이이다. 나는 무능한 주제에 꿈을 너무 오래 좇았다.
미안하다, 아이켄.
용기와 지혜로 헤쳐나간다
용기는 무슨, 오기도 없는데. 지혜는 무슨, 지식조차 편견과 애매해지기 시작하는데. 헤쳐 나가기는 무슨, 버티기 급급한데. 나이는 곧 타성이다. 마흔쯤 되면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자영업자든, 나와 세계의 싸움은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에 굴복한다. 무사안일의 윤리를 받들어 돈 앞에서 조금 치사하고 뻔뻔해진다. 이제는 그 비굴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하루하루, 후안무치와 아집으로 버텨나간다.
우주 평화 위해 싸우는
어렸을 때는 내 또래의 캐릭터들이 정의를 수호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내게 메칸더V의 원자력 에너지가 없는 게 한스럽기도 했고, 어느 날 검은 양복을 입은 요원들이 나타나 사실은 내가 우주를 지키는 용사이니 사명을 받들어주길 부탁하는 상상도 했다. 성인이 되고 보니 우주 평화를 왜 굳이 내가 지켜야 하나 싶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다. 우리 식구를 먹여 살린 아버지가 퍽 대단해 보이고, 겨우 아버지가 대단해 보이는 만큼 내가 초라해진다.
만약 우주가 위기에 처한다면 굳이 내가 나설 필요까지 없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민중들은 하늘과 땅이 맞붙어서 맷돌질을 했으면 좋겠다고 열분을 토한다. 나는 냉분을 흘린다. 우주 따위 그냥 다 사라지라지. 어차피 시시한 인생이었다. 남은 인생은 노화를 수락해 나가야 하는 만큼 더 시시해질 것이다. 우주가 한 순간에 공멸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차선이다.
용감한 친구들 자랑스런 친구들
삶의 기묘한 점은 개인이 지닌 개별성이 시간이 갈수록 보편성에 수렴해 가 범주화 된다는 것이다. 마흔은 한 인간의 개성이 드러나기보다는 그 나이가 지니는 평균을 적당한 편차 안에서 타협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아마도 남편/아내, 특히 부모라는 역할이 지니는 강력한 정체성 때문인 듯하다.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 꽃이 되던 친구들은 이제 엄마, 아빠로 불릴 때 더 큰 꽃이 되었다. 내겐 봄날의 민들레처럼 시시한 꽃이다. 친구들이 자랑스럽지 않지만, 엄마, 아빠로 불리길 선택한 사실을 보면 친구들은 나보다 용감한 것은 인정한다. 그 용기 덕분에 친구들은 스스로 홀씨가 되어가는 과정에 내가 모르는 축복을 누릴 것이다.
요즘 나는 도통 꽃이 된 적이 없다.
에어스타 타고서 하늘을 나는
내가 가르쳤던 고3이 대학을 졸업하고 늠름한 백수가 되어 나타난 적이 있다. 엄마 거라며 차를 몰고 왔다. 아이였던 학생이 누나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차는 어른의 물건이었고, 나는 운전할 줄 몰랐다. 면허는 있지만 운전이 무서웠다.
나이는 문화로 먹는다. 갑각류가 껍질을 벗듯 차, 결혼, 출산으로 지난 일상을 깨부수고 새로운 일상을 껴입을 때, 비로소 나이를 자각하는 것이다. 나는 차에서부터 막혔을 뿐만 아니라 매년 중고등학생의 풍경에 매몰되어 있어 가는 시간을 실감하지 못했다. 마주 보며 나이를 나눠 먹을 사람이 없다보니 나는 이십대 중후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혼자 늙어버린 하늘을 나는
보지 못한다. 문득, 나는 완연한 아저씨다.
원터키디 원더키디 원더 원더 원더키디
불행 중 다행인 건, 소설가가 되겠다며 인생 반쯤 포기했는데도, 읽고 쓰던 습관이 논술로 밥 벌어 먹게 만들어준 사실이다. 차마 놓지 못하던 소설을 놓은 시점과 통장이 비만해지는 시점이 겹치고 보니, 인생이 참을 수 없이 시시해졌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거 지금 세일하는데 사줄까요?
부모님들이 자식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을 조카들을 보며 조금 이해했다. 내게 자식이 있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내 새끼를 어화둥둥 하며 내 노동의 의미를 찾았을 것이다. 꿈을 버린 지금, 현실에서 가장 빛나는 의미는 자식에게 있음을 공감한다. 자식이 있는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그레고르 잠자류의 소외를 겪을지 모르겠지만, ‘자식이야말로 삶의 원자력 에너지’가 참이어야 유전학이 설명된다.
돈은 생존의 바탕이고 꿈은 삶의 바탕이다. 누군가는 꿈 없이 ‘플렉스’ 하게 삶을 구매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은 자극에 쉽게 익숙해진다. 소비를 주축으로 한 과시는 시기만 다를 뿐, 한계가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식이 호명할 때 피는 ‘꽃’ 향기는 무한하다. 사실, 플렉스를 영속할 만큼 잘 벌어먹는 사람도 얼마 없다. 꿈을 이룬 사람도 얼마 없다.
신비한 메달이 뿜어내는 무한한 힘에
꿈 없이도 잘 살아보고 싶다. 우리 목에 걸린 넥타이는 오라를 닮았지만, 원더키디가 있기에 신비한 메달이다. 살아보고 싶은 무한한 힘을 준다.
작년 같은 올해를 반복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지겹다. 오라를 목에 맨 채 고도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유행가도, 최신 영화나 드라마도 도무지 기다려지지 않는다. 꿈을 품어 도도했던 청년 시절은 갔고, 미미한 존재감만 남아 쏠쏠한 수입만을 목 빠기게 기다리는 시시한 아저씨. 더 늙어갈 내게 랄라랄라 랄랄라라 공격 개시, 그런 심정이다.
이슬처럼 쓰러지는 우주의 악당들
참이슬이든 처음처럼이든 다 못 마셔서 쓰러지는 것은 내 쪽이었다. 회식의 악당들은 다들 나보다 힘이 셌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쓰러지던 그 나이를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측은했고, 악당이라고 여겼던 그들이 이미 쓰러져 있었던 것이 보였다. 모두가 쓰러진 사회에서는 쓰러져 있는 것이 정상 같아서 모른 척,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지키자 평화를 우주의 평화를
다시 말하지만 우주 평화 따위는 관심 없다. 무의미투성이 세상에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원더키디가 생기면 다를 것 같다. 원더키디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이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와 같이 먹은 음식점, 아이와 같이 간 놀이 공원, 아이와 같이 본 영화, 아이와 같이 걸은 길, 세상은 원더키디로 가득해진다. 그러므로 우주를 지키는 것은 부모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저출산 시대, 우주는 누가 지킬 것인가?
나는 아니다.
달려라 아이켄 날아라 예나
신춘문예 18년, 낙방은 연례 행사였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연말마다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희망하지 않아야 했다. 희망하지 않으면 절망할 것도 없다. 적정 수준의 우울을 유지함으로써 최악을 예방하는 것이 내 생존 전략이었다. 그래서 내게 아이켄이 없다. 나는 꿈도, 아아켄도 죽여버렸다. 이제 I can보다는 I can’t가 더 익숙하다. 내가 무엇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할 수 없이 살아간다. 날기는커녕 달리기도 포기한 배불뚝이 아저씨의 소소한 I can의 노래, 원더 원더 원더 원-더 원더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