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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Mar 20. 2018

제주에서 1년 살기(13살 소년)

갑자기 이런 글이 써졌다

우여곡절 끝에 초등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바라는 바도 아니고, 제주에 와서 겨우 일주일만 생활하고 나와 완전히 헤어진 것이다. 조금은 굴욕적인 일이었다.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애썼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리고 중학1학생 나이의 소년(학교에 다니지 않는) 한 명만 남았다. 제주에 있어야 하나, 제주를 떠나야 하나 기로에 서는 순간, 또 다른 탈학교 동갑내기 소년이 내게로 왔다. 그래서 만 13세 소년 두 명과 지내고 있다.

딱 2년 전에도 아주 비슷한 상황이었다. 모두 수료하고 떠난 후 초2년 나이 아이 하나만 남은 상태에서 갑자기 중3 소년 한 명이 아빠 손에 끌려 내게 왔다. 잠시 학교는 쉬기로 하고, 기운을 차려서 학교로 복귀하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그 친구는 공립학교로 돌아가서 현재 고1이 됐다. 당시에 #아래의글을 썼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생각은 좀더 보완되고 방법론도 가다듬었다. 더구나 장소가 이제는 제주 중산간마을이다. 매일 걷고 있고, 부모의 도움을 받아 5월 한달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예정이다.

두 명으로는 제주생활이 어렵다. 한 두 명 더 합류하면 좋겠다. 기존 아이들에게도 친구가 필요하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생활광고에 작은 광고를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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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한 명이 여러 가지 이유로 3월 초부터 등교하지 않고 아침에 내게 와서 공부한다.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수업을 따라가기 어렵고 성적이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준이라는 것이다. 일단 아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상식적 판단을 하는 녀석이라 함께 공부하는데 부담이 없다.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한다는 것. 한마디로 자심감을 잃어버렸다. 필연적으로 자존감도 낮은 상태다. 학교 성적에 관해서 자포자기한 느낌이다.

경험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 심리적 퇴행을 보인다. 사춘기 성향도 나타나지 않고 독립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기를 받아주고 이뻐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으로 심리적 퇴행을 하는지, 심리적 퇴행이 낮은 자존감을 낳은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대부분 전자라고 보고 있다.

내 미션은 이 친구의 자존감을 높이고 학교생활에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톰 크루즈도 “미션 임파서블”한 과제가 아닐까.... 난 오랫동안 이런 목표가 왜 불가능한 미션인지 고민했다. 이 고민이 해결되지 않으면 집단적 성격의 공교육은 거의 허상이다. 아니 명백한 사기다. 반드시 줄서기 서열을 만들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높은 서열을 차지하라고 말하는 것이 사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교육 운동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꼴찌라도 인간의 존엄은 똑같으며,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수행해야할 덕목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1989년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주제 아닌가. 하지만 대세의 흐름은 “서열에서 밀리는 순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덜 불행해지는 길”이며 현실에 빨리 순응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학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라고 말한다. 교사의 말이 아니라 아이들의 말이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서열에서 밀린 어린이청소년들은 철저하게 냉소적이다.

고민의 결론을 거칠게 말하면, 미션 수행(낮은 자존감을 끌어올리기)을 위해 교사인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질문이 잘못된 것이다. 즉 교사가 ‘어떻게’를 동원해서 방법론적인 타개책을 고민하는 한 미션은 영원히 임파서블한 것이다. 교육과정은 결국 정보의 소통과정이며 공교육 수업이란 소통과정을 구조화 해놓은 것이다. 소통이기에 발신자와 수신자의 역할분담은 분명하다. 쌍방향이 발신자가 수신자가 되고 수신자가 발신자가 되는 역전의 반복이라고 해도 발신자는 발신을 하고 수신자는 수신을 하는 역할수행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사 입장에서 ‘어떻게’를 고민하는 것은 발신자의 입장을 전제로 한 생각이다. 그런데 교사가 발신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수십 년 경험의 결론이다. 교사가 발신자 역할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깊은 산속에서 숯막을 짓고 숯을 구워낼 수는 있겠지만 구운 숯을 지게에 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팔 수 없는 노릇이다. 숯이 고급연료였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 숯은 연료의 기능을 상실했다. 예외적으로 고기를 구워먹는 집에서 사용되지만 말이다.

지금은 학습자가 발신자가 되고 교사가 수신자가 돼야한다. 학교와 교사가 없어질 거란 미래학자의 예견은 직업으로서 교사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교사의 역할이 수신자가 된다는 말이다. 수신자 교사라면 폐쇄적인 라이센스를 요구할 일이 아니다. 라이센스를 개방하고 교사의 역할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 누구나 교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교사는 훈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학교와 교사의 소멸은 정보소통에서 발신자로서 교사역할을 제도적으로 막는다는 말이다.

학습자가 발신자가 되려면 수신자라는 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교사도 반드시 필요하다. 교사가 발신자가 되는 기회도 있다. 교사는 교사의 위치와 역할을 벗어나서 학습자 입장이 될 때 발신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위에서 말한 중학생과 구체적인 장면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를 본 계기로 주토피아 스크립트를 가지고 영어 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단어는 생소한 것 투성이지만 문법적으로 단순한 문장들이라 영어공부가 가능하다고 봤다. 하지만 나랑 공부하는 중학생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워낙 영어 울렁증이 심했기 때문에 영어 문장을 읽고 말하고 쓰고 외우는 작업이 버거운 것이다. 이 녀석이 생애 처음으로 외운 문장이 “If you don't try anything new, you'll never fail."이다. 이 문장을 유독 능숙하게 외우고 여러 날 지나가도 기억했다. 토끼 아빠엄마가 어린 딸이 경찰이 되겠다고 하니까 말리면서 하는 말이다. 토끼가 동물세계에서 경찰이 되는 것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를 지극히 위험한 것이라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학교는 나의 시도에 대해 언제나 ‘fail’ 도장과 ‘loser' 인증으로 응답했던 것이다.

오늘 하마터면 다음과 같이 꼰대 잔소리를 할 뻔 했다.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는다면 어떤 실패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성공도 없겠지.”

여전히 내 안의 교사 DNA는 발신을 하려고 한다. 학생이 외우는 영어 문장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워낙 거침없이 외우고 뜻도 잘 알고 있기에 위 문장이 학생의 발신메시지로 자리 잡은 경우다. 학생은 작고 약한 토끼가 기어이 경찰이 돼서 ‘try anything'하고 동물세계가 평화낙원을 지속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과정을 잘 알고 있다. 교사인 나는 그러니 너도 ’try'하라고 압박할 일이 아니라 학생이 ‘try'와 ’don't try' 사이에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다리는 수신자 역할을 유지해야 한다.

의사결정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하니 한참을 고민하다가 ‘don't try'를 선택한다. 당연한 선택이다. 수신자는 발신자의 발신내용을 수정, 보완, 편집, 교정하려고 하면 안 된다. 다음 발신을 기다리는 수신자의 위치만 알려주면 된다.

진정한 갈림길은 여기서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수신자는 다음 기회에 발신자가 ‘try'를 다짐하는 발신을 강하게 기대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수신자는 발신 내용에 편향된 기대를 갖지 않아야 한다. 발신자에게 자신의 기대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발신자의 발신 내용을 철저하게 수용하고 인정하겠다는 입장이어야 한다. 이게 쉽지 않다.

사실 여전히 나는 이 녀석에게 발신자 입장이 되고 학생이 수신자가 되라고 종종 밀어 붙일 것이다. 7개월만 만날 예정이라 긴 호흡이 불가능하고, 언제나 수신자 입장에 있던 어린 학습자가 발신자로 변신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세상은 이미 변했고 나와 만나는 어린 학습자는 결국 발신자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하지 않는다면 삶의 주름을 펴기는 불가능하다. 어린 학습자가 발신자로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어른 수신자에게 책임이 있다.

이 얘기가 토요일 대안학교 아빠들 앞에서 펼치는 강의의 주제다. 구체적인 내용은 현장의 분위기와 질문 내용에 따라서 다이내믹하게 요동칠 것이다. 강사나 청중이나 스릴 만점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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