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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Sep 16. 2018

5년 전 일기

무엇이 구렁텅이의 내 아이를 구원하는가

 2013.3.20


지난 3월 9일 학부모코칭 강좌를 단재학교에서 열었다. 제도학교 중학교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의 핵심변경 사항과, 무엇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경계를 이루는지 그리고 중1을 기준으로 앞으로 6년 동안 공부계획을 어떻게 짜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강의하는 형태였고 2시간을 넘기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준비한 말을 빼먹기도 했다. 이런 강좌는 5년 전 한겨레신문문화센터에서 6개월 간 진행한 부모교육프로그램이 원천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하나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의 한계와, 또 하나는 제도학교 학생에게 해당하는 제한점이 그것이다. 우리 아이들처럼 제도권에서 벗어난 학생들은 초점이 다르다.

이런 강좌를 진행한 것은 단재학교 홍보와 이미지 제고 때문이다. 이번에 우리 학교 철수 동생 철희가 중학생이 되었기에 철수 부모님도 참석했다. 어쨌든 이 때 거론된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이 아이들을 공부에서 멀어지게 하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20년 이상 아이들을 만나온 내 경험을 바탕으로 우치다 타츠루, 박동섭 선생님의 가르침, 그리고 끊임없는 고민 과정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우선 학습과 배움에 대한 오해가 크다. 지식이 실체를 갖는 존재가 아니며 내 안(內)이 아닌 바깥(外)에 존재한다든가 'Learning by Doing'으로 일컬어지는 행위의 결과로서 학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 몰라도 누구나 잘 성장할 수 있다. 다만 현재 청소년들의 학습에 대한 오해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학습을 노동으로 여기는 것이다. 학습은 노동도 아니며 놀이도 아니다. 인간 활동의 총체적 산물이 학습이다. 다시 말해 학습을 통해 산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물의 현시가 학습이라는 개념적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학습을 노동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매일 일터에 가듯이 정해진 시간에 "학습"전용공간(학교 따위)으로 이동해야 했고, 공부시간과 휴식 시간이 분명히 구분돼 있으며, 학습감시자의 권위가 굳건하여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제 산업의 탄생과 제도학교의 탄생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 학습자는 당연히 학교 공부를 "노동"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실제로 학교 공부는 노동의 형격을 띤다. 학교공부의 성격이 공장노동자의 과업과 같지만 성격도 같다. Before-After가 달라야 하고 "시험"이라는 외형적 도구에 의해 성과를 측정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불량률을 최소화하고 높은 생산성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외형적 도구에 의해 측정된다. (경영학적/경제학적 측정도구를 동원해야만 Before-After 차이를 가시적 결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학습을 노동으로 받아들이면(여기서 노동은 자본주의 임금노동을 말함) 그에 따른 대가(보상)를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급여 없는 직장에서 노동하지 않는다. 대가 없이 일하는 것은 직장에 소속되어 임금노동을 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다.

학교가 선발을 위한 서열을 포기하지 않는 한 90% 이상의 학생은 자신이 대가 없는 노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10%에게만 노동에 따른 과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90%의 학생들은 죽어라고 일했지만 악덕기업주를 만나 월급을 떼이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맛본다. 1.8%(100명 중 1~2등)가 S.K.Y 대학에 진학하고, 총 10% 학생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이다.

80년대까지는 학생들이 학습을 노동(임노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의 상황은 봉건영주에 속한 농노와 같은 상황이다. 노동을 하지만 자유로운 계약관계에 의한 임노동이 아닌 숙명적 노동이었다. 내가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노동이 아니기에 존재하는 한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내면화한 것이었다.

농노가 근대사회에서 자유로운 신분을 가지고 노동자로 변동되는 사회 배경처럼 90년 대 이후 학생들은 정치 환경의 변화를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정치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문민정부(김영삼)의 열린교육/국민의 정부(김대중) 이해찬 장관 교원정년 단축과 "하나만 잘하면 대학간다" 슬로건/참여정부(노무현)의 자기주도학습/이명박 정부의 창의성 교육은 군부독재 시절 교육정책과 구분된다. 모두 창의적 인재(인적자원)육성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가발과 운동화 만들어 미국 시장에 수출하던 시절과 자체 기술로 반도체를 만드는 시대는 차별성이 분명하다. 창의적 인재가 필요한 것은 대기업의 수요였다. 창의적 인재로 보이는 자원은 몸값이 수십 배 뛰면서 능력을 갖추면 연봉협상을 통해 개인이 기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경제 규모의 엄청난 변화에 기인한다. 경제 환경이 엄청나기 때문에 교육환경도 빠르게 변하고 그에 따른 학생과 학부모의 기대치와 미래 포커스가 급속하게 변했다.

과거에도 능력 있는 자가 성공하고 잘 산다는 공식이 존재했으나, 90년 대 이후 사회경제적 파이가 워낙 커지면서 성공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극명하기에 "능력"에 대한 열망은 광적 욕망(말 그대로 미친 상태)이 된다. 청소년에게 "능력"은 성적 서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느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학생들은 계속 속게 된다. 사회가 어린 학생들을 계속해서 배신하는 것이다. 문민정부 들어서면서 신도시의 확대 공급, 그에 따른 강남의 귀족화, 고급아파트의 등장, 서민들도 자가용 승용차를 갖는 상황에서 학교는 공책을 없애는 실험을 한다. '열린 교육'이란다. 쓰지 않고 기록하지 않고 활동코너를 배회하면 수업이 끝난다. 아이들은 공부하지 않았고 교사도 가르치지 않았다. 교실이 놀이터가 되면서 붕괴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중학생의 학력은 곤두박질쳤다. 학력이 떨어져도 시험의 난이도를 낮추면 되었다. 학교는 선진화된 것처럼 떠들었다. 읽고 쓰고, 외우는 활동이 후진적인 것처럼 선전되었다. 전과목 시험인 학력고사가 아닌 수능의 도입이 이때 이루어진다. 수능은 종합적 창의적 사고력을 요하는 진보적인 시험이라고 학생과 부모를 속이면서 등장하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학교를 교육의 장이 아닌 경제활동단위로 본다. 마치 MB가 토건 정책을 펼치듯 2000년 대 들어서면서 막대한 자금을 학교에 푼다. 학교 신축이나 증개축 자금규모가 100억 대로 뛰어오르고 전국 모든 교실에 대형 TV와 컴퓨터를 보급한다. 기업이 학교에서 장사(방과후교실 등)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순차적으로 에어콘을 보급하고 난방기를 대부분 도시가스형태로 바꾼다. 이때 교육인적자원부란 명칭을 사용하고 수시전형을 도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차피 학교는 선발의 기능만 무리 없이 진행하면 되었다. 물 호스의 출구 쪽을 손가락으로 적당히 막아 단면적을 줄이면 수압이 올라가는 것처럼 대학선발제도를 통해 청소년교육정책을 모두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시로 바뀌어 수시전형이라는 웃지 못 할 우스개가 나오는 것처럼 학생과 부모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사교육의 창궐로 GDP는 계속 오르는 효과를 본다.(2010년 한국 농업GDP를 학원GDP가 추월함)

참여정부의 교육 슬로건은 "자기주도학습"이다. 언뜻 듣기에 사교육을 잠재우고 학교교육에 충실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천만의 말씀이다. 학교라는 시스템이 자기주도적일 수 없다. 노무현이 고백하듯 권력은 시장에 넘어간 상태에서 사교육의 배후에는 재벌화된 거대 사립대학재단이 있다. 1974년 실시된 고교평준화는 사실상 완전 해체된 상태가 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자기주도학습시대를 보낸다. 어린 학생에게 "너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이미 아이들은 자기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다. 혼자서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한 시대에 뭘 어떡하라는 것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명박 정부 5년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창의적 인재 육성"이 슬로건이지만 어느 누구도 창의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학생들조차 대통령은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강북과 강남, 일반인문계와 특목고, 서울권 대학과 지잡대의 차이가 하늘이 내린 계급처럼 작용하는 시대에 스스로 루저로 자리매김한 아이들은 PC방에만 의존하였다.

정리하자면, 학습을 한다는 것이 천부(天賦) 과업으로 알았던 80년 대 이전과 달리 90년 대 이후로 학생들은 학습을 다양한 선택 사항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한국경제의 비약적 팽창으로 말미암은 기업 환경의 변화와 군사정권의 하차와 표면적 민주화진행이 서양의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제 실시와 시민계급의 성장에 유비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세에 상업자본 축적을 통해 부르조아 자유시민으로 변신한 무리는 상대적 고소득 계층의 아이들 성격을 대신한다. 생존권이 영주에게 귀속됐던 농노들은 자유를 얻었으나 자본가와 계약에 의한 노동자 신분 또한 함께 동반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한국 청소년들은 선택의 자유를 얻었지만 결국 대학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우리는 90년 대 이후 사회변동을 신자유주의로 부른다. 교육문제의 신자유주의 흐름을 강조하는 것이 모두 이러한 배경을 갖는다.     

여기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가 있다. 과거 자유주의 시대에 5살 꼬마도 햇빛 없는 지하에서 목숨을 건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구원한 것은 제도학교라는 것이다. 제도학교의 탄생을 노동자 배출의 전초기지로만 봐서는 안 된다. 아동 인권을 보호하고 아이들 올바른 성장을 도모하는 역할도 학교가 수행했었다. 그러나 90년 대 이후 한국적 신자유주의 시대의 학교는 노동자 배출의 역할도 인권 수호의 수행도 다 실패했다는 것이 가슴 아픈 비극이다. 오히려 학교를 다녀서 상처를 받고 폐인이 되며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기고 있다. 어찌하여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우치다 타츠루는 글로벌기업의 성장과 국민국가의 충돌에서 국민국가의 쇠퇴를 그 원인으로 들고 있다.


국민국가라는 정치단위에 재기불능의 타격을 가한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기초해서 기업 활동을 벌이는 사업체를 ‘글로벌기업’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글로벌기업은 더 이상 특정한 국민국가에는 귀속하지 않습니다. 경영자도 주주도 같은 나라의 국민이 아닙니다. 언어도 종교도 생활습관도 다릅니다.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기업의 수익을 늘리고 주가를 올리고 적절한 타이밍에서 다 팔아서 자기이익을 확보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중략)

이 이익상반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 학교교육입니다.

학교는 애당초 국민국가 내부적인 장치입니다.

학교의 설립목적은 ‘차세대의 국가를 담당할 수 있는 성숙한 공민의 육성’입니다. 제대로 된 어른을 계속해서 공급하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른을 키운다’는 것은 100년 스팬(span;기간)으로는 아주 합리적인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글로벌자본주의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일단 다음 4반기의 수익을 올리는데 필요한 인재의 육성’입니다. 능력이 높고 임금이 낮고 체력이 있고 권리의식이 희박하고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있어서 상사의 말에 순종하고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하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의존 받지 않는 회사명령 하나로 다음 날부터 해외의 지점과 공장에 부임할 수 있는 청년(그것을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글로벌 인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청년을 대량으로 비급(備給)하는 것을 학교에 요구합니다.

(중략)

학교교육을 비롯해서 지금의 세계에서는 모든 섹터에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원리’와 ‘국민국가의 원리’가 다투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명이 다른 생물’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배우지 않는 아이들, 노동하지 않는 청년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수명감각’을 꽤 깊게 내면화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수명을 5년 정도 설정해서 그것에 기초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의 불합리’와 ‘노동하는 것의 부조리’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논리 하에서는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들의 생물로서의 수명은 5년으로는 끝나지 않는 데에 있지요.

(후략) (하류지향 2013년 한국어판 저자 서문 中)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작년 일본에서 인터뷰할 때 매우 재밌는 말을 했었다. 내가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라고 물으니 이런 대답을 했다.*하단주)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마르크시스트(Marxist)와 마르크시안(Marxian)입니다. 마르크시스트는 마르크스주의를 그대로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마르크시안은 마르크스 샘물을 떠 마시는 바가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가지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담기는 샘물의 형태는 다를 것입니다. 저는 우치다라는 마르크시안이지요."

재미있으면서 교묘한, 또한 재치 있는 대답이라고 느꼈다. 우치다 선생님은 매우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분이다. 그 대안의 철학적 바탕이 튼실하고 다양한 경험을 한 분이기 때문에 적용 가능한 진단을 내린다. 위 저자 서문도 마찬가지다. 국민국가가 끝물이고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한동안은 국민국가의 기틀이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혼란과 그에 따른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런 해석이라면 나도 동의한다.     

이번 교단일기는 제도학교에 다니는 중학생을 염두에 두고 당장 고통에서 벗어날 해법을 제시하는 내용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역사적 배경을 거론해야겠기에 큰 범위에서 에둘러 말하고 제자리로 왔다.

닥공이란 신조어가 있다. '닥치고 공부'의 준말 형태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공부하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닥공해야 한다. 모두에서 말했듯이 학습은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것을 준비하기 위한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의 모든 결과물을 잘 분류하는 작업이다. 그러니 학습에 대한 고민과 염려, 두려움 없이 닥치고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수행한 후에 공부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언명이 지금의 중학생들에게 다가설 리가 없다. 하기야 어른들은 받아들이겠는가.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로 치부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치다 선생님처럼 근본을 말하기보다 당장 혼란과 비극을 막기 위한 대안을 말하려고 한다.

학습이 노동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학습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임금노동과 같은 성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임금노동은 자유권을 지키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계약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임금과 자신의 노동을 교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청소년들은 (최근 카자흐스탄이나 몽고 등 중앙아시아를 경험한 분들은 중앙아시아 학생들이 우리의 7~80년 대 학생 같다고 말한다. 이런 고분고분한 학생들 태도는 북유럽국가도 마찬가지였으나 최근엔 급격히 '개판'이 돼간다는 전언이다) 교환을 염두에 두고 학습을 설정한다. 마치 월급을 받아야 공부하겠다는, 그리고 그것이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청소년들이 공부를 대가로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그것이 아이들의 "불쾌감"이라고 했는데(아이들이 불쾌감을 화폐로 지급한다), 일면 기발한 착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국 상황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청소년들의 불쾌감 대방출도 어느 나라 못지않겠지만, 한국의 경우 대가(보상)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화폐로 지불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한국 청소년들은 소비를 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존재를 확인하다.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평소에 실천한다. 코기토의 변형으로 '소비하는 나'를 내세운다. 따라서 소비를 위한 자유를 학습의 대가로 원한다. (최신 스마트폰, 럭서리한 스키니진, 연예인들이 쓰는 모자, 패셔너블 의상과 깔맞춤 신발, 날 안심시킬 지갑 속 현찰과 캐시카드가 아이들의 소망리스트) 당연히 학습에 대한 보상을 공약으로 내거는 부모의 잘못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제3순위의 항목이다. 2순위는 청소년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의한 소비조장일 것이고 1순위는 당장 몇 년 후를 보장받을 수 없는 청소년들의 처지가 차지한다. 1순위의 등 뒤엔 경쟁을 사회의 원동력으로 삼는 이 시대 주류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거래는 같은 가치를 교환(등가교환)할 때 거래 당사자 서로 불만 없이, 불평등하지 않게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우리 사회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변함없는 시장경제사회의 룰이라고 당연히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시장경제사회가 어떤 변혁을 겪을지 모르겠지만(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갖겠지만) 당장은 시장경제체제가 흔들렸을 때 생기는 혼란과 비극을 걱정해야한다.

핵심은 시장경제의 등가교환이 허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교환을 통해 사회와 문화를 유지 발전시켜왔지만 그 교환은 부등가 교환이기에 가능했다. 교환의 태초는 증여로 시작한다. 누군가 처음 증여하지 않는다면 교환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태초의 증여는 내가 아닌 남에게 주는 것이라 증여품의 가치란 상대방 입장에서의 가치이며 그것이 얼마나 될지는 상대방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므로 증여자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증여했을 때 그 보답을 받겠다는 전제가 있다면 증여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두가 등가교환을 전제로 타자와 관계 맺기 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며 성립 불가한 것이다.

학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아이들이 등가교환에 입각한 보상을 전제로 공부한다는 것은 말로서만 표현되는 것이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즉 보상을 전제로 공부한다는 것은 학습행위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학습이 노동과 전혀 다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통해서 결과를 만들지만 학습은 결과에 의해 성립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학습이 거래에 의한 행위일 수 없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 또한 비현실적이다.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전면화 시키며 교환시장에서 자기 행위의 가치만큼 보상 받지 않으면 루저라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려놨기 때문이다. 설득하다 숨  넘어간다. 어른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설득 자체가 불가능하다.

마지막 방법은 아무런 대가 없는 노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술적인 아이디어이다. 일종의 꼼수이다. 다만 매우 떳떳한 꼼수라 할 수 있으니 마음 놓고 활용하자. 대가도 없는데 즐겁게 노동하는 것을 누가 보여주겠는가. 부모 밖에 없다. 부모의 가사노동은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주로 엄마가 가사노동을 전담하면서 부정적 요소가 노정됐기에 아빠의 가사노동이 훨씬 효과적이다. 아빠는 돈벌이를 위해 바깥에서 등가교환에 의한 노동을 하지만 집에서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대가 없는 노동의 대표는 봉사활동이다. 즉 증여이다. 부모가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증여하는, 그래서 즐거워하는 장면을 연출하면 된다. 뭐가 된다는 말인가. 내 아이가 학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이가 봉사와 증여의 과정을 직접 경험하도록 하자. 증여는 증여 후에 얻는 기쁨을 전제하지 않는다. 아무런 보상의 약속이 없지만 인간의 문화DNA에 새겨진 교환과 교류에 의한 관계 맺기를 수행하는 것은 닥공(닥치고 공부)의 동기가 된다. 그 출발은 가족에 대한 구성원의 헌신에 있다.(헐리웃 영화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구분하길 바란다)

씨리얼과 우유로 해결하는 아침식사부터 바꾸자. 일찍 일어나서 가사노동을 한다는 것은 힘든 수고로움이다. 그것은 헌신일 수밖에 없다. 급식이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면 도시락을 정성껏 싸주자. 인터넷을 뒤져서 멋진 도시락 레시피를 검색하고 요리사급 도시락에 도전하자. 급식을 한다면 간식을 수제로 준비해보자. 직장 생활로 바쁘겠지만 어금니 꽉 물고 부엌에서 일해보자. 보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 노동이 있으며 그 혜택을 내가(청소년 자녀) 받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기술적인 방법이다. 자녀에 대한 서비스를 돈으로 해결하는 것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불편하지만 일부러 재래시장을 이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좀 먼 거리도 걷고, 전기와 연료도 줄이며 내복을 사용하고, 인스턴트 가공 식품 사먹지 말고, 장류와 김치 같은 발효식품 자주 먹고, 가능하면 슬로우푸드 직접 만들고, 이웃과 알고 지내고,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여럿이 어울리는 운동을 해보자. 아이가 등교할 때 침대가 아닌 현관에서 배웅해야한다.

만약 내 아이가 학습에서 멀어지고 자존심도 상했다면 그 원인은 시간의 흐름을 고려한 사고 작동이 멈췄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10년 후, 20년 후를 생각하기는커녕 올해가 바탕이 돼서 내년이 온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시간이 거세당한 것이다. 동일 평면상의 시간일 경우 눈에 보이는 보상에 집착하게 된다. 진짜 보상은 꽤 긴 시간을 돌아서 나중에 받는 것인데, 소거된 시간 속에 사는 아이들은 고스톱판의 현찰박치기처럼 당장의 지불을 요구한다. 외상은 없다. 당장 지불할 수 없다면 판에서 떠나야한다고 생각한다. 부자 부모가 아니라면 아이들의 업신여김은 당연한 사회가 되었다. 부모를 못마땅해 하거나 미워하는 아이들은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시간을 고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인한다.

시간의 회복은 봉사와 증여에 있다. 내 행위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즐겁게 수행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 아이를 구원한다.


*주) 이글을 읽고 박동섭 선생님이 전화주셨네요.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마르크시스트와 마르크시안의 구분은 우치다 선생님 저서 <레스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 나온다면서 다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2018.9.16 오후 1시경)


우치다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박준규 선생님과 같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마르크시스트와 마르크시안의 차이점에 대해 한 마디 보태자면 마르크시스트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르크스의 말로 풀어내는 사람이고, 마르크시안은 마르크스의 말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면에서 박동섭은 비고츠키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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