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디야델카미노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한번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한번째날(2019.10.31)



1.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200km 길은 메세나 고원지역으로 거의 평지인데다 나무가 없고 끝없는 초원이 펼쳐진다. 여름과 겨울에 너무 덥거나 추워서 순례꾼들은 지루하게 느껴서 기차를 타고 점프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일단 비교할 기준이 없어서 아이들은 특별함을 느낄 수 없다. 지평선을 볼 수 없는 한국의 지리적 특성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초원이 하늘과 닿는 뷰를 신기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은 걷기에 딱 알맞은 온도와 기후를 보여서 특별히 힘든 조건도 아니다. 사실 태즈매니아의 초원을 질리도록 보고 살아서 스페인의 메세나 초원은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혼자만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갈망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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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는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서 숙소에 들어가는 것, 더 시간이 지나서 마드리드에 가서 한식을 먹는 것, 그리고 호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럼 이 지루한 길을 걷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미는 언제나 사후적으로 따라온다. ‘의미있다’ 또는 ‘의미없다’를 행위 이전에 관념적으로 가늠한다는 건 착각이다. 한국사회, 특히 한국의 교실은 이런 착각을 증폭시키고 주입한 죄가 있다. 아무도 자기의 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건 왜 하는 거죠? 어떤 의미가 있나요?”


“지금 네가 하는 건 나중에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의미가 있어”


주동자와 피동자 사이에 위 대화가 무한반복하며 한국인은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란다. 사실은 반대가 맞다. 위 대화를 무한반복할 때 후자의 말을 뱉는 이가 주동자의 지위를 확보하고 전자의 말을 발화하는 자가 피동적인 위치에 선다.


다시 말해 행위 이전에 의미를 찾는 이가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없다. 자신이 의미를 이해했을 때만 미션을 수행하겠다는 자세는 매우 소극적이고, 숙제를 회피하고 싶은 심리의 반영이다. 미션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문화라는 사회의 패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새로운 삶의 패턴을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는 주장과 가르침은 유감스러운 거짓이다.


아이들 앞에 길이 놓였다. 부모와 선생에 의해 강제로 놓였다. 거꾸로 갈 수도 없다. 벗어날 수도 없다. 일단 종착지로 가야한다. 힘들게 자신의 발로, 어깨에 부담스러운 배낭을 메고 가야한다. 도착하고 나서 의미는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만의 새로운 패턴을 구상할 수 있다.


‘오늘도 시간이 빨랑 지나서 하루를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 반복하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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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아이들은 좋은 컨디션으로 9시간을 걸었다(휴식과 식사 시간 포함) 까미노를 걷는 어른들 속도와 비교할 수 없이 느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걷기와 먹기와 자기만으로 하루를 구성한다. 2시 이전에 숙소에 도착하고 씻고 빨래하고 숙소 주변 마을 돌아보면서 블로그에 일기 쓰고... 이런 어른들과 달리 길에서 9~10시간을 보내는 우리 아이들의 까미노 생활이 아이들에게 더 적합하다. 덕분에 인솔하는 가디언으로서 내 여유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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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도 다양한 외국인들과 조우한다. 한 프랑스 중년 여성은 프랑스 중부 지역부터(이름을 들었는데 기억 못함) 걸었단다. 그리고 내게 묻는다. 왜 까미노에 한국인이 많나요? 저는 놀라운 일이에요. 뭐라고 대답해야지?


“프랑스 노란조끼 투쟁처럼 한국도 부당한 차별에 대한 저항이 있고, 그 정도가 심해요. 그로인한 마음의 상처가 큽니다. 스페인 까미노를 걸으면 상처가 치유된다는 소문이 났어요”


이 말을 최대한 아는 영어 단어를 동원해서 말했는데 얼마나 전달됐는지 모르겠다. 듣는 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 전후로 보이는 스페인 청년은 이름이 마리오라고 했다. 핸섬하고 얼굴 전체에 수염이 덥수룩한데 마리오라고 하니 이탈리아인하고 물었더니 스페인 사람이고 마드리드에 산다고.... 런던에서 가드닝 노동자로 살았고 최근에는 멕시코 식당 주방에서 일했는데, 다음 직업을 구하는 사이 까미노를 걷게 됐다고 한다. 그러더니 “너는 왜 아이들과 이 길을 걷느냐?”고 묻는다. 걷는 게 테라피라고 했더니 공감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검은 피부의 이태리 청년은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만나길 반복했는데 늘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다. 내가 아닌 아이들의 안부에 대해서 걱정한다. 상대의 안부를 살피는 게 몸에 밴 느낌이다.


엊그제 만난 독일 커플을 빼놓을 수 없다. 둘은 텐트와 우쿨렐래를 지고 다닌다. 이들도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만나길 여러 번 했다. 언제나 텐트에서 자고 알베르게를 이용하지 않는다. 춥지 않다고 말한다. 여자는 우리 일바지(몸뻬)같은 넉넉한 꽃무늬 바지를 입고 다닌다.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서 둘 다 간호사로 일했고,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돈벌이에서 멀어지겠다고 결심하고 까미노를 걷고 있다고.... 산티아고 도착 후 독일로 돌아가면 새로운 직업을 찾을 생각인데 돈을 모으지 말자고 합의했단다. 젊은 친구들인데 한국전쟁과 한반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나와 모든 한국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트럼프, 아베, 시진핑, 푸틴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유감이라고 순하게 표현했다. 크게 공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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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 대학동기가 함께 까미노를 걷는 한국 청년과 짧게 얘기했다. 이들은 우리 아이들 이름도 알고 알베르게에서 시하 태호에게 친절을 베푼 친구들이다. 같은 대학에서 만난 친구인데 한 사람은 국문과, 두 사람은 호텔경영 전공이었단다. 자신들을 백수라고 소개하길래 나는 늙었고 아이들과 지내는 게 힘에 부치지만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후계자를 찾고 있으니, 매력을 느낀다면 연락하라고 농담 분위기로 말했다. 페북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하니 자신들은 인스타그램만 한단다. 어쩐지 페북 사용 연령이 매우 높더라니^^ 이제 인스타 안 하면 인싸가 되긴 어렵겠구나....는 걸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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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아디야 작은 마을에 들어와서 약간의 해프닝이.... 아이들이 종종 나를 먼저 가라고 말하고, 자신들만의 할 얘기가 있다고 한다. 외길이라 먼저 마을에 들어와 중앙광장(조그맣다)에 앉아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시하가 나타났다. 조금 길을 헤맸단다. 헤맬 길이 아닌데.... 문제는 태호가 없어졌다는 것. 시하도 모르겠다고.... 자전거를 탄 세 중년 여성에게 남자꼬마 아이 봤냐고 물으니 못 봤다고 한다. 순간 작년 제주도 곶자왈 실종 사건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온 길을 거꾸로 걸어가다보니 자전거 탄 여성 한 분이 날 찾아왔다. 아이 찾았다고.... 태호가 다음 마을로 계속 걸어가고 있었던 것. 아이를 믿으면 안 된다. 작년에 교훈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실수를.... 이제 놓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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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좀 특이한 알베르게에 들어왔다. 가족이냐고 묻더니 우리 세 명만 묵는 별도의 방을 준다. 방에 들어오고부터 내 컨디션이 급속하게 나빠졌다. 점심 먹은 게 좋지 않다. 아이들 먹지 않은 음식을 싹쓸이 먹어치운 게 잘못인 듯. 알베르게에서 저녁만찬을 준비해서 순례꾼 전부가 모여서 함께 먹는 분위기다. 이런 알베르게는 처음이다. 먹겠냐고 우리에게 묻지도 않았다. 아이들만 식당으로 보내고 나는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아이들이 입이 귀에 걸린 채 방에 돌아왔다. 너무너무 잘 먹었고 최고의 음식이었다나.... 다음에 이 집 또 오자고 한다. 다행이다. 스페인 음식 형편 없다고 늘 불만이었는데 현지 음식의 매력을 한번이라도 느꼈으니 말이다. 나는 완전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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